<살인의 추억>은 묘한 영화다. 2003년 상반기 최대 히트작인 이 영화는 대중영화의 흥행코드와는 거리가 먼 영화다. 대중이 원하는 세상을 그려 보이는 것도 아니고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주인공도, 충격의 반전도 없다.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를 주인공으로 삼았음에도 공포물이나 형사영화, 스릴러 등 장르에의 유혹을 거부한다. 노스탤지어에 기대는 듯하면서도 결코 과거를 화사하게 치장하지 않는다. 흥행요소를 꼽는다면 송강호의 스타파워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엄청난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풍기는 분위기도 묘하다. <살인의 추억>은 엽기적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 연쇄살인은 할리우드영화에나 흔히 나오지 한국에선 정말 드문 일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이상스러우리 만치 친밀감을 준다. 눈에 익은 듯한 논밭, 산야, 가옥들, 그리고 시골 경찰서 풍경이 회갈색 톤을 주조로 펼쳐지는 데다 등장인물들의 연기가 이들 배경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일까. (등장인물들은 탁월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송강호 특유의, 보는 이를 단숨에 무장해제하는 시골형사 연기는 칭찬할 말이 부족하다).
80년대 후반 6월항쟁으로 치닫던 시기 한국사회의 격동으로부터 초연해 보이는 시골에서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경기도 화성 일대는 시골이라 해도 도시와 시골의 경계(liminal area)라고 해야 할 지역이다. 도시가 주는 회색 콘크리트 이미지와도, 시골 하면 연상되는 순박한 고향의 이미지와도 거리가 있는, 그래서 우리의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조금 빗겨나 있는 그러한 소읍이다. 이러한 경계지역은 흔히 새로운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충동질하는 효과를 지닌다.
<살인의 추억>의 스토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시골 형사들이 연쇄살인범을 잡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왜, 어떻게 실패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중적 흡인력은 이 "왜"와 "어떻게"에 대한 대답에서 온다.
시골과 연쇄살인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잠들어 있던 것만 같은 영화공간을 활성화한다. 황금빛 벌판을 가로지르는 수로는 시체 유기 장소가 되고, 형사들은 현장검증을 하느라 무논을 첨벙거리고, 철로변 전봇대는 용의자의 도피처가 된다. 연쇄살인범이 숨어 있는 듯한 숲은 갑자기 내게 달려들 듯이 보이고, 눈앞을 턱 가로막는 거대한 레미콘공장의 모습은 이미지의 폭력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낯섬과 혼란을 통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무능 또는 무지다. 그리고 심각한 기본의 결여다.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와 그의 조수 격인 조용구 형사(김뢰하 분)가 살인 용의자들을 취조하는 전반부는 어이없음의 진수를 보여준다. 박두만은 용의자의 신발을 몰래 집어와서 족적을 조작하고, 조용구는 용의자를 표나지 않게 까기 위해 군화 위에 덧신을 껴 신는다. 박두만이 무모증 용의자를 찾으러 대중목욕탕을 전전하는 데서는 애처로움까지 느껴진다.
천연덕스런 연기에 실린 이들 장면은 이 시골 경찰의 수준이 낮음을 보여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체 경찰의 수준,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수준, 정권의 수준까지 한꺼번에 보여준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실제로 동네 약사는 불법의료행위로 돈을 버는 박두만의 정부에게 "보사부 표창이라도 달래라"고 한마디 한다).
또 용의자들은 어떠한가. 백치이거나 변태성욕자이거나 아니면 무기력한 인물들이다. 다만 마지막 용의자 박현규(박해일 분)만이 뭔가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렇다. 영화는 마치 당시가 그랬다고 말하는 듯하다.
봉준호 감독이 기막히게 포착했듯이 연쇄살인사건은 80년대 또는 전두환시대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 균열은 시대의 야만과 타락, 무능을 드러낸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가 안개처럼 영화를 감싸고 있음에도 우리가 박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상이 동정과 공감을 매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정과 공감은 주로 세 형사에게로 향한다. 박두만은 직감적이고, 서태윤(김상경 분)은 과학수사를 신봉하고, 조용구는 발길질이 앞서지만, 변태 용의자를 사력을 다해 뒤쫓는 장면이 보여주듯 범인을 잡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의 진정성이 끝내 좌절하는 데에 이르면 우리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들이 지은'죄'는 까맣게 잊어먹고서.
무당을 찾아가거나 무모증 환자를 찾는 박두만의'기행'은 무능을 보여주는 기표가 아니다. 그 대신 그의 진정성이 효율적으로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얘기해준다. 박두만과 서태윤이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범인이 지능적이거나 이들의 능력이 모자라서만이 아니다.
영화는 80년대라는 시대가 살인사건을 해결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고 속삭인다. 구타와 고문수사는 관행처럼 이뤄지고, 수사지원 인력은 데모 진압에 동원된다. 용의자 유전자 샘플은 국내엔 분석장비가 없어 미국으로 보내야 한다. 이중에서도 80년대의 총체적 무능과 결여를 형상화하는 최고의 기표는 민방위훈련이다. 훈련공습경보 사이렌은 세상을 암흑으로 몰아넣고 모든 것을 "동작 그만"시킨다. 훈련공습경보가 발령되는 동안 범인은 또 한 명의 여성을 엽기적으로 살해한다.
이 영화가 주로 박두만의 시각을 특권화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살인의 추억>을 박두만 개인의 실존적 의미와 연결해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박두만은 진정으로 사건해결을 원한다. 소박한 시골 형사가 이처럼 열정과 집념을 가지고 사건에 매달리고 잠을 설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 이명세 감독)의 우형사 정도라면 모를까. 그럼에도 그가 끝내 실패하는 것은 박두만이 속한 집단, 그가 속한 시대가 그의 사명의식, 직업의식, 나아가서는 소망을 실현하는 데, 의미 있는 삶을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으로써 기묘한 방식으로 박두만은 시대의 희생자가 된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한적한 시골에도 타락한 시대의 부당한 억압의 손길은 어김없이 존재한다.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 한복을 차려입은 채 길가에 늘어서서 전두환의 행렬을 맞아야 하는 여학생들 모습 위로 살인범에 능욕당하고 죽임을 당했던 여린 여성들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전두환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 희생당하고 구원받지 못한 숱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곧 80년대를 거쳐온 우리의 (또는 윗 연배의) 자화상과 겹치는 것은 왜일까. 어쨌거나 이제 구원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아픔을 뒤늦게나마 어루만지게 된 것은 그나마 우리가 이젠 과거를 돌아보고 위무할 여유를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살인의 추억>은 흔치 않은 영화다. 시골형사의 실패담을 통해 군부독재라는 앙상한 개념으로만, 또는 개인의 파편적 경험으로만 다가왔던 80년대를 구체적 질감으로 추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존엄마저 갖지 못한 채 죽어간 희생자들과 근거 없이 닥달당했던 죄없는 용의자들은 마치 전두환 일당에게 농단당했던 우리처럼 보인다. 살인범을 잡으려 애쓰는 세 형사에서도 우리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살인의 추억>은 곧잘 난데없이 우리의 삶을 흐트러놓는, 길들여지지 않고 낯선, 날뛰는 힘으로 표상돼 온 우리 역사를 얘기로 풀고 이미지로 형상화함으로써 길들이고 재해석한다. 그것도 인간적인 터치를 곁들여서. <살인의 추억>이 보여주듯 80년대란 미시적으로는 '희극적' 순간들로 점철되었으되 포괄적으로는 비극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환기하는 시대상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고군분투하는 박두만 형사에 공감하기 어려웠다면 <살인의 추억>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대중영화가 단지 심심풀이 땅콩 - 미국식으로 말하면 팝콘 - 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 삶의 경험까지 끌어들여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도 있음을 입증하는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살인의 추억> 등 흥행공식에서 벗어난 일련의 영화들이 흥행에서 성공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평가들은 웰 메이드(well made) 영화라는 용어를 고안해냈다. 영화를 잘 만들면 관객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전제를 은연중에 깔고 있는 이 말은, 그러나 별로 설명해주는 것이 없다.
대중의 호응이란 영화의 구조적, 형식적 짜임새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잘못 만든 영화 - 예컨대 얘기가 아귀가 맞지 않거나 배우의 연기가 어색하거나 편집 리듬이 뒤죽박죽이거나 - 가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영화가 잘 빠졌다고 해서 관객이 구름처럼 몰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초록 물고기>(1999년, 이창동 감독)나 <고양이를 부탁해>(2001년, 정재은 감독)가 흥행에 실패한 것을 상기해보라. 즉 웰 메이드는 대중적 호응의 필요요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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