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와 그 동료들은 〈고향 잃은 마음(The Homeless Mind)〉이란 책에서 현대인의 세계는 공사(公私) 영역의 분리로 특징지어진다고 했다. 쉽게 말하자면 현대인은 자신이 사는 세계가 두 대립하는 영역, 즉 자유롭고 신나고 의미있는 영역으로 여기는 사적 영역(private realms)과 구조적 제약, 타율과 억압으로 특징지어지는 공적 영역(public realms)으로 나뉜 것으로 여기며, 가능하면 공적 영역을 벗어나 사적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생활세계론은 현대인의 심성뿐만 아니라 대중문화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기능면에서 보자면 대중문화란 현대판 '행복의 기약(une promesse de bonheur)'으로서 억압과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풍요를 맛보고자 하는 우리의 기본적 욕망을 충족해주겠다는 속삭임이기 때문이다.
김지운 감독의 탁월한 흥행작 〈반칙왕〉(2000년)은 공사 영역의 분리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는 세계를 그려 보인다. 시종일관 말단 은행원 임대호(송강호 분)를 좇아가면서 영화는 일터(은행)와 놀이터(체육관과 링), 직장일과 레슬링을 확연히 대비한다. 이를 통해 선명하게 우리 삶의 구조적 핵심을 드러낸다. 부수적으로 엄청나게 웃기는 순간들을 듬뿍 제공하면서.
대호는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든 직장인이다. 지옥철로 불리는 출근길 서울지하철에서 시달리는 모습에서부터 계좌유치 실적이 부진하다고 부지점장에게 공개적으로 닥달당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대호가 전형적 루저(loser)로 그려지는 것은 그가 유별나게 못나서가 아니다. 구조적인 이유에서다. 직장에서 한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자본에 잘 봉사하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영화에선 이 평가시험이 예금유치 캠페인이다. 예금유치는 행원의 본업은 아닐 테니 은행측이 광고를 통하거나 세일즈맨을 고용해 할 일일 터인데도, 행원들은 온갖 압력 하에 캠페인에 동원된다. 개인별 유치실적이 공표되고 인사고과의 핵심자료로 쓰인다. 자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이윤을 최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월급쟁이들은 원칙도, 존엄도 지킬 수 없게 된다. 부당한 대출압력에 시달리던 동료 두식이 직장을 박차고 떠나는 장면에 우리가 속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칙왕〉에서 직장의 질식할 듯한 억압성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부지점장의 '공포의 헤드락'이다. 비정한 상사는 꿈속에서마저 대호의 목을 조른다. '공포의 헤드락'은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공적 영역이 얼마나 억압적이고 살벌한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공적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사적 영역으로 진입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대호가 어떻게 부지점장의 헤드락에서 빠져나올까 고민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대호는 우연히(?) 레슬링에 입문하게 되고 반칙전문 레슬러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레슬러의 이중생활을 하게 된다.
대호는 레슬링에서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레슬링의 세계는 직장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대호는 돈벌이에도 남의 시선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60-70년대 흑백TV로 레슬링 중계를 보며 자란 세대로서 김일의 박치기, 여건부의 알밤까기에 열광했던 대호는 오직 자신이 좋아서 레슬링을 한다. 그러면서 비로소 자기만족을 경험한다. 만족을 얻기 위해 도전하고 도전에 수반되는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한다. 실제로 주변적 구경거리로 전락한 프로레슬링으로는 큰돈을 벌 일도 없고 엄청난 명성을 얻을 일도 없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관객의 환호를 받는 것이고 링 위에서 즐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프로레슬링이 프로 축구나 야구처럼 거대 비즈니스라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레슬링은 대호의 삶을 바꿔놓는다. 우선 대호는 부지점장의 헤드락을 깨는 방법을 배운다. 간지럼을 태우는 것이다. 긴장된 대결의 순간을 놀이와 유희정신으로 헤어나는 것이다. 마치 구조적 현실이란 것이 접근법을 달리 하면 가볍게 돌파할 수도 있는 것임을 시사하기라도 하듯이. 나아가 대호는 레슬링을 통해 남의 눈치나 보며 억눌려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획하고 실현하는 삶을 발견한다. 그래서 레슬링은 다른 사람에겐 쇼 비즈니스이겠지만 대호에게는 성취의 터전, 유토피아적 비전을 실현하는 장이 된다.
이처럼 레슬링은 악몽과 같은 현실, 즉 공적 공간에서 벗어나 사적 공간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레슬링의 세계는 소외된 노동의 어려움/고통을 이길 수 있는 생기와 의미, 자신감을 주는 공간이 된다. 대호가 은행건물 계단을 오리걸음으로 오르거나 전철 안에서 링체조를 하는 것은 적대적이기만 했던 공적 공간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사적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존경쟁이란 명목 아래 질식할 듯한 억압이 지배하는 공적 공간에 의미와 즐거움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은행원이 링의 강자 유비호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은, 아니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영화가 아닌 현실에선'희망사항'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레슬링의 세계는 일종의 판타지다.
그런데 놀랍게도 〈반칙왕〉은 판타지를 극대화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의 마취적 효과를 완화하려 한다. 이를 위해 〈반칙왕〉이 택한 전략은 레슬링의 세계가 실은 마이너(minor)의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인공이 한물간 프로레슬링 무대에 가면을 쓴 채 반칙레슬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황야의 무법자〉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부지점장과 대결한다. 그는 양복--이것이 은행원의 작업복이다--을 입었는데 어울리지 않게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를 쓰고 있다. 가면을 써야 부지점장과 맞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게임의 규칙은 링의 규칙과 달라서 그가 승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미끄러지고 만다. 이는 여느 대중영화들이 우리가 바라는 바를 마치 실제 현실인 것처럼 그리는 것과 대비된다. 전에 다뤘던 〈신라의 달밤〉이 깡패 세계가 실은 여러모로 마이너한, 주변적인 세계임에도 마치 세상이 깡패의 논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렸던 것과 비교해 보라.
〈반칙왕〉을 관통하는 비주류 마이너 성향은 영화가 허구적 판타지에 머물지 않도록 한다. 유토피아적 세계를 우리 현실에서 구현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종의 판타지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지만, 동시에 공적 현실에 굴복, 좌절하지 않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반칙왕〉이 부추기는 억압적 현실에 대처하는 방법은 시스템의 논리를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다. 소심하고 착실한, 순화된 조직인간의 상징인 은행원이 반칙 레슬러가 된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에의 저항이자 규칙의 위반이다. 그럼으로써 〈반칙왕〉은 현실과 판타지 세계를 분리, 대립하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서로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어둔다.
아마도 〈반칙왕〉이 판타지세계를 그리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에 닻을 내리려 했던 것이 흥행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 현실은 보는 이를 몰입케 할 만한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이나 센세이셔널한 충격효과,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반칙왕〉이 그려 보이는 세계가 소중한 것은 평범한 은행원의 보편적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현실에 꺾이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평범치 않은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으로써 〈반칙왕〉은 여느 진지한 예술영화 못지 않게 우리의 욕망에 대해, 우리 삶과 사회에 대해 발언한다. 그것도 쉽고도 재미있고 명확하게.
* 한마디 덧붙이자면: 필자는 삶의 핵심을 대중적으로 풀어나가는 재능 때문에 김지운을 건강한 대중영화의 귀재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그가 장르영화로 끌리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반갑지만은 않다. 초기작 〈조용한 가족〉(1998년)과 〈반칙왕〉이 (현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현실에의 끈을 놓지 않는 영화들이었다면, 최근작 〈장화, 홍련〉(2003년)과 〈달콤한 인생〉(2005년)은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허구 또는 가상현실, 판타지로서의 영화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판타지를 절묘하게 결합해 기묘한 방식으로 '사물의 핵심'에 육박하는 〈반칙왕〉같은 대중영화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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