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쉬리〉의 남파 테러리스트 박무영의 말대로 '우리의 소원' 노랫말처럼 공허하고 상투적인 제스처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나마 얄팍한 우리의 호주머니를 축낼 가능성이 있는-- 천문학적이라는 통일비용을 떠올려보라-- 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산가족이 아닌 한 통일이란 뒤통수를 당기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이 아닐까.
그동안 우리가 들어 왔고 상상해 왔던 통일은 너무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또 민족적인 것이었다. 통일은 항상 민족과 역사를 걸고 넘어가는, 너무도 심각하고 너무도 거창한, 각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그래서 늘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거기에다 갖가지 희생도 요구한다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통일이 나에게 당연하고도 좋은 것인가'라는 사적인 차원의 질문은 아예 떠올리기도 어려웠다. 민족적 대의와 당위 앞에 개인의 이익이나 의미를 따지는 것은 이기적 태도가 아닐까 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바탕을 둔 자기검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편의 대중영화가 우리의 통일에 대한 부담감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위업을 성취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바로 그 영화다. 2000년 역사적인 김대중-김정일 남북한 정상의 만남 직후에 개봉된 이 영화는 한 해전 〈쉬리〉가 세운 흥행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열띤 호응을 받았다. 〈JSA〉의 성공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북한을, 통일문제를 접근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JSA〉는 있을 법 하지 않은 남북병사 간의 만남을 다룬다. 공동경비구역 내 남한병사들이 몰래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북한병사들과 놀다가 돌아온다는 설정이 내러티브의 핵심을 이룬다. 남북분단 대치상황 하에서 이들의 만남은 통일과 관련되는 함축을 지닐 수밖에 없다. 〈JSA〉는 우리들이 이제까지 접해 왔던 통일 담론과는 전혀 다른 버전의 통일을 그려 보인다. 이 버전은 이전 것들과는 너무 달라서 래디컬하기까지 하다. 영화에서 통일은 굳이 통일이라는 레테르를 붙일 필요조차 없는, 이념의 장벽과 경계를 말끔이 허문 상태에서 형제, 이웃끼리 어울리는 것으로 재현된다. 이것이 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삼엄하게 군비무장돼 있는 DMZ에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JSA〉가 수사의 내러티브 구조를 택하고 있는 것은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이 영화는 중립국감시위원단 소속 소피 소령(이영애 분)이 수사를 통해 숨겨진 진실을 양파껍질 벗기듯 하나하나 밝혀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진실은 판문점 북한초소에 일어난 총격사건의 진상이다. 누가 누구를 쏘았는가. 영화가 보여주듯 남북대치 상황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가로막는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자기의 이념과 구미에 맞게 사건을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진실은 두 명의 남한 병사와 두 명의 북한 병사가 왜 자발적으로 비밀리에 만났는가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진실은 남북한 당국뿐만 아니라 사건관련자들이 왜 사건진상을 은폐하려 했는가와 관련된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독자의 기억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은 비무장지대 정찰업무 도중 낙오된 채 지뢰를 밟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뜻밖에도 그는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와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 병장은 생명의 은인 오 중사가 코앞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 초소에 근무하는 것을 알고 돌에 감사편지와 함께 가요 카세트를 매달아 던짐으로써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 이에 정우진은 농담 삼아 이 병장을 북한초소로 초대하고 이 병장은 군사분계선을 그냥 건넌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의 말을 직접 전하기 위해. 이처럼 남북병사 간의 비밀회동은 지극히 인간적인 상호작용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 만남으로 이 병장, 그리고 그의 안내로 북한병사들을 근접거리에서 보게 되는 우리는 새삼스레 진실을 깨닫게 된다. 북한병사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김광석의 노래에 감동하고 포르노잡지에 호기심을 보인다. 사투리가 있긴 하지만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욕망을 지니고 같은 놀이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북한 병사들은 쉽사리 서로 형이 되고 동생이 된다. 이들의 만남은 무엇보다도 따뜻하고도 즐거운 형제간의 만남이었다. 두 번째 질문의 진실은 그들이 함께 있고 싶어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진실을 숨겨야 했을까. 물론 이 병장, 남 일병과 오 중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설정한 '신성불가침의 금지'를 위반한 중범죄를 숨기기 위해서 사실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위해서이기 이전에 군사분계선 반대편의 '형제'의 안위를 걱정해서다. 이들이 진상을 밝힐 수 없는 것은 남북 젊은이들의 사사로운 만남을 터부시하고 단죄하는 서슬 푸른 외적 환경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극히 자연스런 욕망의 추구를 방해하고 저지하는 객관적인 환경과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건재하는 한 남북간의 만남은 범죄로 낙인찍힌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남북한은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당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환경이 외세, 특히 미국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양키놈들이 워게임인지 뭔지 하면… 남북 (경비병) 모두 3분 안에 전멸"이라는 오 중사의 말이 그 중의 하나다.
네 병사는 50여 년간 남북한을 갈라놓았던 이데올로기적 금제를 무시하고 만난다. 실은 이러한 정치적 함축에 대한 의식 없이 '그냥 좋아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병장이 남 일병에게 한 발언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인상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같은 동포끼리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뭐가 어때서?" 그러고는 가장 그럴듯하지 않은 곳에 유토피아적 공간을 건설한다. 이것은 말처럼 거창하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만나서 즐겁게 놀고 형제애를 가꾸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유토피아일 수 있는 것은 DMZ가 적대와 파괴의 공간이어서 화합과 평화를 허용치 않아 왔기 때문이다.
〈JSA〉가 제시하는 새로운 통일의 버전은 외세와 이념을 배제한 채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념은 '형제'를 갈라놓고 분열시킨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대변자격인 표 장군은 세상의 인간을 두 부류--빨갱이와 빨갱이의 적--로 나눈다. 그는 한국 땅엔 "중립이 설 자리가 없어"라고 단언한다. 이념이 끼어들 때면 돌연 네 병사의 공동체는 긴장에 휩싸이고 파괴의 위험에 직면한다.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는 오 중사를 보고 이 병장이 반농담으로 초코파이 실컷 먹을 수 있는 남한으로 내려오라고 권유하자 경필은 삼키던 초코파이를 게워낸다. 이념은 결국 네 병사가 형성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북한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최 상위가 등장함으로써 네 병사는 갈라서서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고 필연적으로 파국을 맞는다.
마지막 엔딩을 장식하는 한 장의 흑백사진은 네 병사를 하나하나 보여주며 그 간의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게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모습은 이 병장이 손을 내밀어 제지하는 포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외국인 관광객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것일 뿐만 아니다. '우리'의 고통을 알지 못한 채 분단을 눈요깃거리로 접근하는 '남'의 시선을 거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분단의 배후에 자리잡은 외세의 영향력을 부정하려는 몸짓으로도 읽힌다.
남북한이 그냥 하나 되어 어울리는 것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과격한 꿈 중의 하나일 것이다. 〈JSA〉는 이 꿈을 대형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대한 많은 관객에 어필해야 하기 때문에 현상유지적 이데올로기를 내장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치부돼 온 대중영화가 우리의 가장 과격한 꿈을 대형화면에 펼치는 일대 사건을 연출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JSA〉는 감독 박찬욱의 재기를 알린 영화이기도 하지만 제작자 심재명의 탁월한 역사인식을 만천하에 드러낸 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전적 상상력에 관객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통일이란 것이 인간적인, 따사로운 것일 수도 있다는 개인의 입장에서 본 통일의 판타지에 열광했다. 통일은 이제까지 들어 오고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달리 즐겁고도 욕망할 만한 것이라는 메시지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아마도 가장 신났던 일은 자신이 미처 꿈꾸지 못했던 것을 영화에서 볼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JSA〉는 90년대초 〈남부군〉(1990, 정지영)이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박광수)에서 시작돼 〈쉬리〉(1999, 강제규)와 〈간첩 리철진〉(1999, 장진)에서 뚜렷해지기 시작한 북한에 대한 탈이념적 접근의 완결판이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JSA〉 이후 북한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적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sympathy)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 DMZ에 탈이념적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아이디어는 영화 〈JSA〉가 처음 내놓은 것이 아니다. 97년 발표된 박상연의 소설 〈DMZ〉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탈이념적 유토피아를 제시함으로써 통일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소설〈DMZ〉가 아니라 영화 〈JSA〉라고 기억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소설(책)이라는 문화 매체는 대중적 파급력 면에서 영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접근 용이성, 감성적 호소력, 편이성 등 대중이 요구하는 속성을 소설/문학은 영화만큼 갖추기가 지극히 어렵다. 문인들에게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문화 또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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