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부터 중국은 북핵문제의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한 중재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2003년 8월부터 중국이 주최하고 있는 "6자회담", 즉 분쟁의 주요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 그리고 이웃나라들인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 간의 회담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2년여간 회담은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는 북한에 대해 미국의 기존방침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북한에 대해 모든 핵프로그램의 이른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폐기)", 미사일 프로그램의 폐기 및 재래식 군사력의 감축, 그리고 테러지원 포기 및 인권문제 개선 등을 요구할 뿐, 북한의 불가침 보장 및 포괄적 관계정상화 요구에 대해서는 불필요하고, 관련이 없으며, 때이른 요구라고 무시하는가 하면 심지어 "협박"이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2003년 8월 첫 6자회담이 끝난 후 중국측 수석대표 왕이는 협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미국의 대북한정책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라고 밝혔다.
워싱턴은 틈만 나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5개국은 협상테이블에서 단결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사실은 불일치가 분명히 드러났다. 심지어 미국은 북한이 비밀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인정했다는 자신의 주장(북한은 믿을 수 없는 협상 상대라는 미국의 입장을 뒷받침할 최대의 근거이기도 한)을 다른 회담 당사국들에게 설득시키지 못했다. 부시 2기 행정부의 주도면밀한 외교적 노력이 펼쳐진 이후인 2004년 말까지도 중국의 리자오싱 외교부장이나 한국의 국정원장은 미국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그 당시엔 이라크 침공을 위한 미국의 정보조작이 충분히 드러나 있던 상황이라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보도 비슷한 의혹을 벗어날 수 없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는 워싱턴의 정통한 한반도전문가 셀리그 해리슨의 글, 즉 미국측의 정보는 단정적인 것이 못 되며, "최악의 시나리오"에 근거한 편의적인 평가라는 분석을 게재했다. 북한이 러시아와 파키스탄의 칸 박사로부터 (우라늄 원심분리에 필요한) 알루미늄관을 구입했다는 (또한 독일로부터는 수입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증거들을 보면, 북한이 본격적인 우라늄농축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고 결론 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은 제2 북핵위기를 초래한 핵심적인 주장(북한이 비밀우라늄농축 계획을 갖고 있다는)과 관련해 다른 협상 당사국들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다른 나라들을 동원해 북한에 압력을 넣기 위한 미국의 시도로서 시작된 베이징 회담은 한국, 중국, 러시아의 미국에 대한 "역압력"의 장으로 바뀌어, 진정으로 다자주의적인 협상의 장이 되어갔다. 협상이 2년 이상 지속되면서 미국의 막말은 줄어들었고 북한과의 대화 용의를 표명했으며, 북한에 대한 "정권 교체(regime change)" 대신 "정권 변화(regime transformation)"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자체로는 용어상의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2005년 9월, 마침내 미국은 굴복했다. 미 국무부의 전직 북한관련 최고위관리였던 잭 프리차드의 말처럼 "6자회담의 다른 네 우방국들로 이루어진 주류에서 소외돼 외톨이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동성명에 서명을 하든지 아니면 회담 결렬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라는 중국 측의 최후통첩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에 따라 베이징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핵문제 해결의 원칙과 목표에 관한 역사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9.19 공동성명에 따라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기존 핵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복귀하며, 이와 관련한 국제사찰을 받기로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적절한 시간에" 경수로 건설 등 경제적 혜택의 제공을 약속받았다.
| 9.19공동성명은 북핵문제를 국제법에 따라 해결할 것이며, 한반도비핵화가 관련 당사국들의 이해에 합치한다는 것, 북한의 정당한 불만에 대해서는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등의 원칙을 확인한 것이었다. |
몇 가지 주요 쟁점들은 모호하게 처리됐다. 예컨대 북한이 폐기해야 할 "기존 핵프로그램"에 농축우라늄 핵무기프로그램이 포함되지는 불분명했다. 미국은 북한이 이러한 비밀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또 언제, 어떤 조건 하에서 북한이 평화적 핵에너지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NPT 제4조에는 조약 가입국의 평화적 핵프로그램에 대한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한국과 러시아, 중국은 북한이 NPT에 복귀하는 순간 평화적 핵에너지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다고 본 반면,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은 북한에 대해서만은 그러한 권리를 부정했다.
또한 9.19 공동성명에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프로그램과 "인권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이 문제들은 워싱턴의 주요 관심사항이며 일본과 미국은 이 문제들의 해결을 강력하게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인권" 문제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은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가 북한의 정권교체, 그리고 동북아지역에 대한 미국 영향력의 확대를 꾀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지만, 북한 인권의 궁극적 개선을 위한 최선의 방책은 "햇볕"정책 추진 및 내정불간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9.19공동성명은 비록 애매하고 불완전하긴 했지만, 북핵문제를 국제법에 따라 해결할 것이며, 한반도비핵화가 관련 당사국들의 이해에 합치한다는 것, 북한의 정당한 불만에 대해서는 대응책을 마련한다는 등의 원칙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평양과 워싱턴의 강경파들은 화해의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선수를 쳤다. 북한은 우선 경수로가 확보된 뒤에야 핵무기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 안전조치협정에 복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은 북한의 NPT 복귀를 위한 모든 조치가 완료되기 전에는 경수로는 "꿈도 꾸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나서 한반도에너지기구(KEDO: 제네바합의에 따라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위해 만들어진 국제기구)를 해체해 버렸다. 평양이 보기에 경수로 제공의 "적절한 시기"는 "지금 당장"이었던 반면, 워싱턴은 "먼 장래"의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무엇 때문에 평화적 핵에너지프로그램을 고집하며, 특히 경수로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북한은 만성적 에너지문제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침 풍부한 우라늄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자체 보유하고 있는 우라늄자원으로 에너지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오랜 숙원을 갖고 있었다. 1980년대 김일성 주석은 러시아로부터 원자로를 제공받기로 했었는데 당시 김 주석은 흑연감속로보다는 최신형 경수로(러시아 VVER형)의 제공을 원했다. 즉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의 추출이 보다 용이한 흑연감속로보다는 첨단기술의 원자로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흑연감속로를 제공하자 김 주석은 매우 분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90년대 김일성이 미국과의 제네바합의에 응한 배경에는 미국의 경수로제공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경수로 제공에 미온적이었다. 특히 2001년 부시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이 약속을 파기하기 위한 기회만을 노려 왔고 결국 2002년 파기하고 만다. 2003년 베이징회담에서도 북한은 경수로 제공 문제를 또다시 제기했고, 미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에 저항했다. 결국 다른 당사국들의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경수로 제공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아마도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킬 마음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핵에 의한 에너지 생산이 현명한 것인지, 경제적으로 효율적인지, 나아가 과연 안전한 것인지는 심각한 의문의 대상이다. 또한 (가입국의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을 규정한) NPT 제4조도 개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일본과 한국이 필요 전력의 약 40%를 핵발전으로 충당하고 중국도 핵발전을 대폭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마당에,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NPT에는 복귀하되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은 할 수 없다고(NPT 가입국은 이 조약 4조에 따라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장하는 미국 및 일본의 요구는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경수로가 북한의 심각한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인가 라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경수로 건설에는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고, 시간도 수 년 이상 걸리며, 나아가 여기서 생산된 전력을 북한 전역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십억 달러를 들여 북한의 송ㆍ배전망을 개선해야 한다. 경수로가 그 나라의 기술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상징물이 될 수는 있겠지만 당면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미 양국에게 경수로는 대결과 불신(양측 모두), 그리고 안보상의 불안(북한측)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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