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워싱턴에서 북핵 및 미사일 문제를 중시하는 실용주의 세력이 한때나마 "정권 교체" 및 "인권문제"에 집착하는 강경파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용주의 세력의 우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5년 말 부시행정부의 북한실무그룹 책임자인 데이비드 애셔가 고위층에서의 "전략적 결정"이라고 지칭한 정책전환이 이루어진 후, 대북정책의 주도권은 국무부 현실주의자의 손에서 보다 고위층의 강경파에게로 넘어갔다. 딕 체니가 이끌고 국무부 군축담당 로버트 조셉 차관이 조정역을 맡은 이 그룹은 모든 부문에서 북한을 압박하며, 특히 북한의 이른바 범죄 행위와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응할 결의에 차 있었다. "전략적 결정"의 목표는 대북 협상의 범위를 (일정한 협상의 진전이 있었던) 핵문제에서 (북한)정권의 본질 자체로 넓혀, 베이징 프로세스를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대신 북한 정권의 붕괴를 추구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마약거래에 연루돼 있다는 주장은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지난 2002년 북한 선적의 봉수호는 호주의 한 항구에서 헤로인 150kg을 내려놓은 후 나포된 바 있다. 선장과 대부분의 선원들은 석방됐지만 2명은 기소돼 장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북한의 마약거래 혐의에 대한 주장은 2005년 들어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북한정권을 범죄조직으로 깎아내리기 위한 포괄적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2005년 9월, 미국 정부는 마카오의 한 은행이 북한 마약거래 대금 및 위조지폐의 돈세탁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이 은행과의 거래중지 조치를 내렸고, 8개 기업에 대해서는 북한과 무기 거래를 했다는 이유로 미국내 자산을 동결했으며, 북한이 대규모로 아편을 재배하고 있다는 탈북자의 주장을 발표했고, 또한 북한이 이른바 "슈퍼노트",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제조, 유통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모든 혐의로 미루어 볼 때 "북한 외교관 및 관리를 포함한 중국의 갱 등 기타 범죄조직들, 유수한 아시아은행들, 아일랜드 무장세력, 전직 KGB 요원들로 구성된 거대한 범죄조직"이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정부의 주장이다. 부시행정부 북한실무그룹의 책임자는 북한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범죄행위를 국가경제전략의 핵심부분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는 유일한 정부, (…) 본질적으로 북한정부를 이끄는 노동당 지도부는 그 행동이나 태도, 관계 등에 있어서 정상적 국가라기보다는 마피아와 같은 범죄조직을 닮아가고 있다."
새로 주한 미 대사에 임명된 알렉산더 버시바우도 비슷한 톤으로 북한을 비난했다. "깡패국가에 대해 무기를 수출하고, 마약거래를 국가사업으로 추진하며, 가짜 미국 돈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범죄정권"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이런 정권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은 마피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북한 외교부 대변인은 12월 11일, 이러한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은 "선전포고"에 해당된다면서 북미대화를 "무기한 중단한다"고 밝혔고, 수일 후에는 버시바우의 소환을 요구했다.
북한정권의 범죄행위에 대한 미국 정부의 주장은, 우라늄 농축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 정보기관의 정보에 크게 의존한 것이었다. 부시의 북한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 이라크전쟁의 경우에 비추어 미국측 정보의 신빙성은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북한관련 정보에 가장 정통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국가정보원은 미국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다. 즉 북한이 1990년대에 위조지폐사업을 진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1998년 이후로는 중단했다는 것이다.
| 결국 2005년 이후 북한문제의 초점은 핵문제에서 범죄 및 인권의 문제로, 미국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 베이징에서 국제무대로 옮겨갔다. |
달러 위조를 근거로 한 미국의 대북 비난이 의심 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 국방부는 2003년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이른바 "작전계획 5030"이란 것을 입안했다. 이 계획은 북한과의 전쟁에 대비해 세웠던 이전의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북한의) 금융체계를 교란시키고, 역정보를 흘리는 등" 북한체제의 교란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만일 북한이 현재에도 100달러 위폐 제조를 계속하고 있다면,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한 수 배워온 것이라는 얘기다. 범죄조직의 위폐 제조와는 달리 정치적 책략으로서의 위폐 제조는 그 자체가 정치적 문제이며 그 해결은 정치적 협상, 특히 적대상황의 해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상황을 누구도 변호하지 않고, 북한이 범죄행위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세력 또한 거의 없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동조세력을 쉽사리 규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외교적 해결책이 도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 의회는 2004년 상하 양원의 만장일치 표결에 의해 "북한인권법"을 채택했으며, 2005년 8월에는 북한 인권특사가 취임했다.
2005년 12월 유엔 총회는 일본, 미국, 유럽연합이 공동으로 제출한 북한인권관련 결의안을 채택, 북한의 무수한 인권침해를 비난했다. 2005년 12월 16일 채택된 '유엔결의 10437호'는 "고문, 공개처형, 임의 구금, 적절한 사법절차의 부재, 강제노동의 만연, 영아들의 비참한 영양상태, 인권조직의 결성 제한, (…) 종교, 결사의 자유 및 국내외 여행에 대한 심각한 제한, 성착취를 위한 여성 매매, 강제결혼 및 강제낙태" 등 북한 인권 침해의 실태를 지적했다.
(북한 문제의) 초점이 "인권"으로 옮겨감에 따라 부시행정부는 북한 국경지역에서의 공작을 점차 강화했고, 방송 등 비군사적 수단에 의해 체제를 잠식하고 교란시키는 "동유럽형"형 작전을 추진하고 있다. 미 북한인권법의 기안자 중 하나이며 우익 싱크탱크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는 2004년 12월 23일, 북한이 1년 내에 내부적으로 붕괴(implode)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는 또한 북한 군 내부에 미국과 협력해 (반김정일) 쿠데타를 일으킬 장군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내년 크리스마스를 누릴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찬가지로 네오콘 지식인들의 집결처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2004년 11월 "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리자"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호로위츠와 마찬가지로 남북한의 두 정부 모두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는 "남한 정부의 비위 맞추기(pro-appeasement)에 정신 팔린 패거리"들이 이 나라를 "'평화학' 대학원 지망생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바꿔놓았다고 비아냥댔다. 이런 시각에 보면 북한과의 협상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며,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굴복뿐이다. 또한 2004년 12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국장에 발탁된 한국계 학자 빅터 차에 따르면, 북한의 굴복을 재촉하기 위해 적절한 외교적 수단은 "징벌의 동맹(coalition of punishment)"을 결성하는 것이다.
미국이 핵문제에 대해 이중기준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인권에 관한 수사 역시 위선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일본에게서는 보편적 도덕적 잣대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수십 년 전 수백만에 이르는 한국인들을 납치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자신의 책임은 나 몰라라 하면서, 25년여 전 북한에 의한 일본인 수십 명의 납치 문제만을 물고 늘어지면서 미국의 대북제재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베이징의 협상테이블에서, 또한 이런저런 기회에 북한의 일본인 납치 책임을 거론하면서 일본은 미국을 거들고 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미국보다도 한 발 더 나아간 강경책을 구사하기도 한다. 2002년 말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대응해 대북 인도적 식량지원을 중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현재 일본 의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가 최우선 처리과제로 돼 있다.
결국 2005년 이후 북한 문제의 초점은 핵문제에서 범죄 및 인권의 문제로, 미국의 말발이 먹히지 않는 베이징에서 국제무대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도출하려던 한국, 중국, 러시아 등 지역당사국들의 노력은 힘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이들 나라들도 북한과 미국에 압력을 넣어 핵문제에 관한 이견을 좁히는 것보다 범죄 및 인권 문제에 관한 미국의 반북캠페인에 저항하는 것이 더 어려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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