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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있으면 뭐하나, 휘발유 없어 피난을 못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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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있으면 뭐하나, 휘발유 없어 피난을 못 가는데"

[강진 현장 르포] 절망 속에도 사재기 막는 지혜 '후쿠부쿠로'

대지진의 혼란으로 일상을 잃은 일본에 때 아닌 '후쿠부쿠로(福袋)'의 계절이 왔다. '복주머니'라는 뜻의 '후쿠부쿠로'란 연말연시 일본 대도시에 처음 놀러 온 외국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다.

서울 명동에 해당하는 도쿄의 하라주쿠, 시부야 등 패션의 거리에는 12월 31일이면 문 닫힌 백화점 앞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긴 줄이 선다. 유명 메이커의 재고상품을 원래 가격과 상관없이 커다란 주머니에 랜덤으로 담고, 그것을 묶어 파격적인 가격에 내놓는 후쿠부쿠로를 팔기 때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은 비싼 옷을 싸게 샀다며, 혹은 오히려 '복불복'이라 즐거워한다. "와, 키츠네 컵라면이 들어있네!" "네가 좋아하는 프리츠(과자)가 들어있어!"

사재기 막는 아이디어

ⓒ프레시안(최형락_
ⓒ프레시안(최형락)

16일 지진 피해를 입은 미야기(宮城)현 해안의 이시노마키(石卷. 센다이 동북쪽 50km) 시로 향하던 중, 히가시마츠시마(東松島) 시에서 그 후쿠부쿠로를 목격했다.

오전 9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볼링장 마크가 그려진 '선 숍'이라는 대형 마트 앞에는 대지진이 강타한 일본에 와서 흔히 목격할 수 있었던 긴 줄이 서 있었다.

이 대형 마트 점원들은 지진 발생 전 마트에 남아있던 재고를 반투명한 흰 봉지에 고르게 나누어 담아, 1000엔(1만4000원)짜리 '후쿠부쿠로'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봉지에는 과자, 컵라면, 초콜릿, 빵 등 금방 썩지 않는 가공식품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마트에 남은 식품을 최대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팔아야 하지만, 한꺼번에 매장에 진입하면 사재기나 충돌 등이 일어날 수 있어서 특별히 고안해 낸 방법이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매일 돌아오는 기약없는 줄서기

500명에 달하는 줄의 선두에 서 있던 야마다 미츠요 씨는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밖에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서 며칠째 줄을 서고 있다"고 말했다.

야마다 씨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줄을 새벽 6시부터 선다고 한다. 눈발이 흩날리는 차가운 날씨지만 사람들은 그날그날의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날씨는 개의치 않는다.

그녀의 가족들은 히가시마츠시마 시에서 다소 떨어진 이시노마키 시에 살고 있었는데, 지진을 당해 서로 연락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왜 피난소에 가지 않느냐고 묻자 "이미 근처 피난소는 꽉 차서 들어갈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피난소에 가면 하루 주먹밥 하나, 빵 하나 정도로 적은 양이지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렇게 매일 기약없이 긴 줄을 설 수밖에 없다.

피난소의 알림판을 이용할 수 없는 야마다 씨는 기자를 꼭 붙잡고 가족의 이름을 알려줬다. 츠치야 케이쥬 씨와 츠치야 카즈히.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체념 가득한 얼굴들

'선 숍' 점원들에 따르면 지진 이후 식품이 새로이 도착한 적은 없다. 지진 직전에 납품됐던 물품들을 매일 조금씩 나눠서 팔고 있는 것이다. 판매 시작 시간은 대략 오전 9시부터인데 아무리 오래 팔아도 2시간 정도면 매진이다. 이날 '후쿠부쿠로'는 단 20분 만에 동났다.

판매처 뒤편에 마련된 자리에서는 '보너스'를 나눠주는 중이다.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혹은 썩기 직전의 양배추나 달걀, 당근, 냉동만두 등 '조리 식품'들을 쌓아놓고 1000엔짜리 봉지를 구입한 이들에게 2점씩 나누어준다.

1인당 1봉지밖에 살 수 없으니 이곳에 줄을 서면 일단 과자 등이 든 봉지 하나와 달걀, 당근 등 재료들 중 두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셈이다.

사전에 공지가 있어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진 않을까.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은 키쿠치 다케시 씨는 "공지 같은 건 없다. 마트를 돌아다니면 알림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고,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는 왜 피난소에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생사가 확인이 안 된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일단 다 살아있고, 난방이 안 되어도 집이 역시 안정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먼저 만난 야마다 씨와는 다른 이유였다.

그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자동차 연료다. 연료는 아무리 주유소가 '선 숍'처럼 고르게 나눠준다 하더라도 현재로선 어딜 가도 구하기 어려운 상태다. 키쿠치 씨 가족은 "연료만 있다면… 일단 어디든 빨리 움직일 수 있지 않겠냐"며 안타까워했지만, 체념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자리를 떴다.

그래도 훈훈한 풍경

오전에 반짝 열리는 재난 속 '후쿠부쿠로' 풍경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훈훈했다. 먼저 온 사람은 나중에 온 사람들을 보며 "어머, 샀네! 다행이다"라며 서로를 격려한다. 서로 봉지를 확인하며 각자가 급히 필요하거나 먹고 싶은 것을 즉석에서 나누어 가지기도 한다.

점원은 마카로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글씨를 쓴 피켓을 높이 들었지만, 뒤늦게 온 10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내일의 판매를 위해 남겨 둔 봉지 꾸러미를 팔았다.

피난소나 친구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고, 전화도 끊겨 안부를 알 수 없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이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봉지를 구입한 이들은 자전거를 세워 둔 곳에 삼삼오오 모여 "가족들은 무사하냐"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프레시안(최형락)

선생님의 슬픈 생일날

마트 주차장 한편에서는 한 쌍의 남녀가 긴 자루에 붙인 팻말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이들은 인근 초등학교의 교사들로, 실종된 학생들의 정보를 수소문하는 중이었다.

오마가리 초등학교 교사 무라카미 타케시(45) 씨는 "몇 명의 학생이 실종됐는지 파악되지도 않는다"면서 실종자 수를 "불명"이라고 밝혔다. 오마가리 초등학교의 전체 학생 수는 424명이다.

무라카미 씨가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어린 학생을 앞세운 주민들이 찾아와 학년, 반 등을 말하며 현재 소재지와 피해 여부를 알렸다. 그는 자신의 나이를 밝히면서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이라고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슬픈 생일은 처음이다"라고 덧붙였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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