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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거목, 알고 보면 은밀한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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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거목, 알고 보면 은밀한 오타쿠?

[이야기의 뿌리를 찾아서] 수류산방의 <박완서 1931-2011>

'프레시안 books'로부터 <박완서 1931-2011>(수류산방 편집부 엮음, 수류산방 펴냄)에 대한 서평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사실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서평 원고의 청탁 수락은 어김없이 뒤늦은 후회를 동반하곤 한다. 책 한 권을 통독한 뒤 그에 대한 독후감을 써내려 가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책도 아니고, 한국 문학의 거목이자 다산성의 작가인 박완서의 구술이라니!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인 연구자가 뭐라고 말을 덧붙이며 끼어들 수 있는 틈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원고 청탁을 수락했던 것은, 서울 토박이 중인 출신의 남자와 결혼한 개성 반가 출신의 1931년생 소설가의 시선으로 다시 한 번 서울이라는 도시의 문화사를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박완서가 남긴 소설들 상당 부분은 해방 이후의 서울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꽤나 정교한 일상의 가상현실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현저동에서 시작해 대학로의 구 서울대학교 교정과 미군 PX 자리였던 신세계 백화점을 거쳐 충신동까지 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 구도심의 변화상을 그려냈고,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고도성장과 더불어 신중산층이 삶의 터전을 다진 용산과 여의도 그리고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내막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1960년대의 서울이, 대학 입학과 더불어 상경한 뒤 도시의 속도와 문화의 격차에 멀미감을 경험하며 동정을 떼기 위해 유곽을 드나들던 지방 출신 1940년대 생 문인들의 몫이었다면, 1950년대와 1970년대의 서울은 박완서 혼자 거의 독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박완서 1931~2011>(수류산방 편집부 엮음, 수류산방 펴냄). ⓒ수류산방
일단, 내가 받은 이 책에 대한 첫 인상은, 박완서가 구축한 풍속의 가상현실을 탐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매뉴얼 같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 가상현실을 건설하는 데 쓰인 체험의 원자재들이 설계자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매뉴얼'의 용도로만 따진다면, 이 구술서보다는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말년에 공들여 정리한 자전 소설 3부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그 산이 저기 있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그 남자네 집>(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이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이내 이 생각은 기각되었다. 왜냐면 이 책은 뛰어난 성취를 거둔 예술가가 자신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형식의 구술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호기심 많은' 특정 독자들이 보여주곤 하는 독서 패턴에 대해 잠깐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 패턴의 전개도를 그리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얼마 전 트위터를 뜨겁게 달군 의자놀이 논쟁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책장에서 공지영 작가의 1990년대 중반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창비 펴냄)를 끄집어내, 그녀의 대표적인 후일담 소설이라고 할 만한 단편 '꿈'을 읽는다.

2.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하고선 동공이 크게 확장됨을 느낀다.

몇 달 전에 사놓고 반쯤 읽은 책은 그런대로 편안했다. 하지만 구호야말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세대들이 있다는 글귀가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문학주의와 운동주의에서 갈등하느라고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유신 세대도 아닌, 살육과 절망의 광주 세대"의 이야기를, 4·19 세대인 평론가는 6·25 세대이자 월남 세대인 한 노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간결하게 적고 있었다. (…) 나는 급하게 책을 덮었다. 정말 살육과 절망만이 가득 찬 글을 읽고 난 뒤처럼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3.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설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을 "부르르" 떨게 만든 4·19 세대의 평론가와 6·25 세대의 노작가가 누구인지를 추론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저런 발언을 했을 법한 평론가와 작가 그리고 관점에 따라선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이 책에 담길 만한 글의 형식이라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구글'을 이용해 볼까 잠시 고민하지만, 검색의 쾌락은 발견의 쾌락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기억 속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적거리다가 결국 용의자를 불러낸 뒤 서재의 책장에서 증거물을 찾기 시작한다. 바로 김현의<행복한 책 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문학과지성사 펴냄).

4. 곧바로 책을 뒤적거리며 문제의 인용문이 담긴 페이지를 찾는다. 133~135쪽, 1988년 2월 3일자 일기다. 김현의 나이 당시 46세.

5. 발견의 쾌락도 잠시 잠깐, 그 일기를 읽다가, <의자 놀이>의 소설가가 이제 당시의 김현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면서 역사의 반복과 차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복잡다단한 심사에 휩싸인다.

바로 이런 유의 독서 경험을 애호하는 이들이라면, <박완서 1931-2011>은 노다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책과 책,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바쁘게 오가다가 그 사이의 맥락을 '발견'하는 독서의 즐거움이 바로 이 책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단순한 구술 채록서가 아니라, '박완서의 말'이라는 풍부한 텍스트를 매개 항으로 삼아 특정한 패턴의 독서 경험 자체를 '내부화'하고 있는 구술 채록서인 것이다.

무거운 주제들이 언급되는 사례들을 다루기에는 나의 역량상 역부족이니, 사소한 잔재미를 주는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자. 아래는 박완서가 평론가 김윤식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이다.

김윤식(1936~) 선생님은 같이 늙어가는 형편이고요. (…) 우리 큰딸이 서울대 다닐 때 김윤식 선생님한테 강의를 들었어요. 제가 신인 시절이지요. 그래도 밤낮 월평에 나고 그럴 때 그 선생님이 제 무슨 작품을 다뤘나 봐요. 학교 때 그런 거 하지 않습니까? 얘가 나중에 선생님보고 그 사람, 박완서가 자기 엄마라고 그랬나 봐요. 그렇게 해서 제 첫 작품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펴냄, 2006년)가 나왔어요. 저야 출판사를 알기나 아나요. 저한테 연락을 해서 한번 가서 뵀더니 작품이 몇 개나 되냐고 물어요. 한 열 개쯤 된다고 그랬더니 "책 한 권 낼 게 되겠구먼" 그러면서 일지사에다 얘길 해 주셨어요. (251쪽)

뭔가 이상하다. 얼마 전에 읽었던 박완서의 유고집 <기나긴 하루>(문학동네 펴냄)에 실린 김윤식의 '박완서와 관악산'을 떠올려 보자. 얼핏 기억하기로는 그 글에서 김윤식이 회고한 당시 상황은 박완서의 설명과는 약간 다른 모양새였다. 흥미를 느끼며 서가로 향하려는 찰나, 책 왼편의 각주가 눈에 띈다. 이걸 어쩌나, 꼼꼼한 편집자는 독자가 누릴 수 있는 발견의 즐거움을 먼저 누린 뒤, 그 결과를 인용문으로 묶어 놓았다. 선수를 빼앗긴 듯한 아쉬움. 그 인용문은 아래와 같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소. 강의를 끝내고 연구실에 들어와 숨을 고르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소. 장본인은 여학생. 쭈뼛쭈뼛하던 그녀의 말인즉, 박완서의 딸이라는 것. 그러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라는 내 표정을 읽은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듯 서둘러 물러나지 않겠는가. 그렇다. 어쨌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소. 그로부터 달포쯤 지났을까. 어느 화창한 날 좀처럼 노크 소리 없는 내 연구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소(그 무렵 내 연구실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노크만 하고 그냥 들어올 것). 들어온 사람은 자주색 한복 차림의 중년급 여인. 박완서라 했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서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에 없소. <나목>(1970년)을 대중소설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로부터 1년이 채 못 되어 박완서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펴냄, 1976년)가 나왔소. 후기엔 이렇게 적혀 있소. "이렇게 빠르게 내 작품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된 것은 평소 일면식도 없었던 김윤식 교수의 주선과 격려에 힘입은 바가 컸다"라고. (250쪽)

위 두 인용문에 담긴 정보를 종합하면, 김윤식을 찾아간 중년의 박완서는 두 명이다. 김윤식의 연락을 받고선 수줍게 자신의 모교를 방문한 박완서와, "그러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라는 김윤식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딸의 이야기를 듣고선 적극적인 태도로 김윤식을 찾아간 "자주색 한복 차림의 중년급 여인".

이 두 명의 박완서는 첫 만남에 대한 상이한 기억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자신의 배려와 도움을 굳이 내색하지 않으려는 김윤식의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요즘 세태에선 찾아보기 드문 옛날 어른들의 이런 미덕은, 박완서가 1926년생 소설가 박경리의 말년을 회상하는 대목에서도 초점이 흐릿한 후경처럼 어른거린다.

▲ <박완서 1931-2011> 중 30~31쪽. ⓒ수류산방

그러면, 호기심 많은 독자들이 흥미롭게 들여다볼만한 또 다른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박완서의 초기 소설들에서는 종종 꽤 파격적인 일탈의 욕망이 내밀하게 투사된 불륜의 환상이, 노골적인 묘사를 거의 배제한 상태로 약간은 부자연스럽게 그리고 파편적으로 등장하곤 한다. 일면 통속적 요소들로 간주될 수 있지만, 이 대담을 읽다 보면, 그런 장면들이 독특한 독서 경험에 연원을 둔 것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그가 자신의 사춘기 독서 경험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저자도 잊어 버렸지요. 열대여섯 살 때, 지금도 애들이 일본 소설 좋아하는 거처럼, 그 전에도 일본 사람들의 그런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243쪽)

대담자는 박완서의 말에 "사소설?"이냐고 반문하지만, 그는 그런 기대로부터 완전히 비껴나간다.

"그런 장르가 따로 있었어요. 소년, 소녀들에게 읽히는 여러 가지. 그 때는 약간의 달콤하고 플라토닉 같은 연애가 가미된 소설이 감미롭게 좋지요. 다들 그거를 거쳐요. 별안간 <파우스트>를 읽어라 그러면 잘 못 읽잖아요."

대화에서 "그런 장르"의 일본 소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지만, 호기심 많은 독자들은 그 정체가 궁금하기 마련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책의 편집자가 선수를 친다. 그는 책의 왼쪽에 그의 에세이집 <두부>(창비 펴냄)에 실린 '내 안의 언어 사대주의 엿보기'라는 글에서 찾아낸 대목을 인용해놓고 있다.

중학생이 되자 내 독서 경향은 동화책에서 자연스럽게 연애 소설로 옮아갔다. 당시 우리들 사춘기 소녀들이 즐겨 읽던 연애 소설은 거의가 일본 상류 사회의 서구화된 연애 풍속도를 다룬 것이었다. 공작이니 후작이니 하는 황족, 귀족 계급의 아름다운 귀공녀와, 서양물을 먹은 세련된 귀공자가 풍광명미한 휴양지나 고급 주택가를 무대로 벌이는 사랑 놀음은 은근히 호색적이면서도 결국은 순결성을 옹호하고 있었다. 성교육이 전무하던 때 나는 일본 연애 소설을 통해 성에 눈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믿는 성에 대한 보수성 역시 그때 주입된 순결성 미화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 (244쪽)

이 지점에 도달하면 호기심 많은 독자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박완서가 1980년대 초반부터 대우전자의 워드프로세서 '르모'를 사용해 글을 썼다고 밝힌 대목을 떠올리면서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게 된다. 게다가 전쟁 경험과 관련된 대표작들은 그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거의 언제나 동어반복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반복에는 김윤식의 지적대로, 나목에서부터 일관되게 외쳐 온 "나만 억울하다!"의 정서가 강박적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생각의 단초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뒤숭숭하게 만들 무렵, 호기심 많은 독자는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장이지 옮김, 현실문화 펴냄)이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은미 옮김, 문학동네 펴냄)을 떠올리면서,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노골적으로 불경한 가설을 하나 세우게 된다. 그것은 박완서를 현대 문학의 거목이 아니라, 요즘 트위터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라이트노벨 후죠시(腐女子)들의 대모 격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에 기울다보면, 독서의 향방은 엉뚱한 곳으로 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왜 쓰느냐'보다는 '어떻게 쓰느냐'에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책의 구술 내용대로 박완서가 "쭉 우려먹은 밑천이 제 체험의 축적인 기억"이라고 한다면, 그 기억의 데이터베이스에 축적된 전쟁 경험의 정보들이, 각각의 소설이 쓰인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도에 따라 재조합되고 변용되는 과정, 그 우려먹으며 다시 쓰기의 과정 자체가 그에겐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사실 따지고 들자면, 이 책 역시 '구술'이라는 형식을 통한 또 다른 다시 쓰기이지 않은가? (약간 첨언하자면, 박완서와 유사하게 반복적으로 자신의 전쟁 경험을 다루는 김원일의 소설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김현의 분석을 참조해볼 수도 있다. ('이야기의 뿌리, 뿌리의 이야기', <분석과 해석 /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전망 : 김현 문학 전집 7권>(문학과지성사 펴냄)).

물론 정통 문학 비평가나 연구자들이라면 매우 불편하게 느낄 만한 이와 같은 이단의 독서법은, 전적으로 이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한 수류산방의 노고 덕분이다. 이들은 박완서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의 안과 바깥을 휘젓고 다니면서, 책의 왼쪽 페이지 전면을 본문과 연관된 수많은 자료들과 인용문들로 가득 채운다.

그러니까 구술 텍스트의 특정 지점들을 허브로 삼아 그와 관련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자료들을 그물망처럼 짜놓고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뒤 그 결과물을 섬세하게 공들인 디자인으로 마무리해 놓고 있다. 바로 이런 수고 덕분에, 호기심 많은 독자는 이제 더 이상, 텍스트의 어느 지점에서 '묘한' 대목을 발견한 뒤 기억을 더듬어 그와 관련된 책들을 서재에서 찾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에 그는 오른쪽 페이지의 구술 내용과 왼쪽 페이지의 자료들을 바쁘게 오가는 호사를 누리면서, 헛물켜는 게 분명한, 하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뻘' 생각의 함정에 빠져들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발견의 쾌락을 빼앗긴 덕분에, 망상의 쾌락을 얻었다고나 할까?

ⓒ프레시안(손문상)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이단의 독서법을 여기서 좀 더 확장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수류산방은 박완서의 '후죠시스러움'에 나름의 '덕력'으로 화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만일 독자가 국립예술자료원의 지원으로 출판된 이 책을 덮으면서 조금이라도 납세자로서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수류산방이 독자들에게 책을 건네주면서 몰래 책갈피 사이에 끼워둔 '덤'일 공산이 매우 높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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