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리스틴 드 피장의 <여성들의 도시에 관한 책(Livre de la Cité des Dames)>의 본문 시작 페이지. ⓒ프랑스 국립도서관 데이터베이스 gallica.bnf.fr |
소르본느 대학에서 중세불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의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김준현 옮김, 문학동네 펴냄)은 이러한 중세 수고본의 미학을 그 글쓰기 양식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지난 몇 년간 대중매체에서 꾸준히 생산된 화려한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어쩌면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여전히 암흑의 시대라는 오명, 그런 거부감을 좀 덜어내더라도 여전히 '중세(中世)'라는 상대적인 개념의 덫에 걸려있는 13~15세기의 유럽 문학에 접근함에 있어 가장 매혹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비슷한 시대를 다룬 요한 하위징하의 <중세의 가을>(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펴냄)이 그렇듯, "세상이 지금보다 몇 백 년 젊었을 때"(역자 역시 이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열매 맺은 이미지와 알레고리들이 도저하게 펼쳐진 과수원을 거닐며 아낌없이,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가는 대로' 수확을 만끽하는 기쁨을 책을 읽는 내내 맛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이미 이야기되었다는" 슬픔'이라는 제목 아래 다루어지는 개념 틀로, 중세의 시인들이 토로한 "주제의 고갈이라는 위기를 말하는 저 고통스러운 확인"(94쪽)이다. 이것은 우선 '중세'라는 이름 아래 다른 세기와 구별되지도 못한 채 편입된 14세기라는 이 특정한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이 시기와 이전 시기 사이에 놓인 연속성이 탈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역자가 설명하듯, "문학의 봄, 즐거운 환희의 시절, 선구자들의 시절"이었던 12세기의 뒤에 이어진 14세기는 "문학의 겨울"이요 "칩거와 성찰 그리고 노년의 시절"(290쪽)이었다.
내전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고, 정신적 권위였던 교황마저 아비뇽으로 쫓겨가고 이후 대립교황의 시대가 열리는 등의 역사적 배경 역시 크게 작용하였다. 기욤 드 마쇼, 장 드 콩데, 크리스틴 드 피장…. 이들은 제각각 다채롭고 생생한 이미지를 동원하여 찬란한 이전 세기의 뒤에 놓여있던 자신들의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것은 전 시대의 "지푸라기(paillettes)"나 "부스러기(mietes)"를 줍는 것이고, 때로는 "단지의 기름(gresse du pot)"를 걷어내는 행위일 따름이다.
| ▲ <멜랑콜리의 색깔들-중세의 책과 사랑>(자클린 세르킬리니툴레 지음, 김준현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여기에서 글쓰는 이들, 또는 글쓰기 자체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는 당위가 연역되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세의 시인들은 도대체 작품의 소재를 어디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작품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산되는지의 문제까지 고민을 넓혀갔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크리스틴 드 피장의 것으로, 그녀는 수태고지의 이미지와 책의 탄생을 연결시키면서 '자연'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서 새로운 책들이 태어나기를 바란다.(…) 비록 고통스럽고 고되겠지만. 그렇기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산모와 마찬가지로, 그대 책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대는 수고스러운 고역의 고통을 잊게 될 것이다."(<크리스틴의 환상>재인용, 120쪽)
이러한 상징체계를 저자는 간결하게 요약한다.
"문학작품은 신이 '그늘을 드리워주는(aombre)' 선택받은 어떤 자의 산물이다. 작품의 탄생은 자연적인 탄생의 하나이며 일종의 수태이다."(120쪽)
또 하나의 개념 틀은 이른바 '계보'에서 비롯한다. "'아버지'라는 말의 출현과 그 잦은 사용(심지어 '창조주'라는 말을 훨씬 상회하는)은 하나의 새로운 감수성, 신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정서적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세르킬리니툴레의 선언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49쪽) 시인들에 의해 다루어졌던 군주들이자 후원자들의 계보 역시 풍성한 내용들로 가득하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자전적 기록의 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욕구"(58쪽)로 요약되는 시인들 스스로의 계보이자 전기이다.
우선 이러한 자기인식에서 글쓰기라는 행위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단초 중의 하나가 드러나기 때문인데, 혈통을 통해 이어받은 글쓰기라는 직분은 그 자체로 장인의 수작업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다가 아니며, 이러한 "실제적 기예, 수공업, 필경사의 작업"이라는 "낡은 개념"의 반대편에 "당시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가의 온전한 주도권"(64쪽)이 놓인다.
이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시인들이 자신들의 계보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에서 후원자에게 전적으로 생계를 의탁해야만 했던 음유시인(ménéstrel)에서 "식자-작가(clerc-écrivain)"로 이행했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둘 사이에는 자신의 보호자이자 영주였던 기욤 드 에노를 "음유시인들의 아버지(le père des ménéstrels)"로 표현하는 장 드 콩데와, 자신의 선배격이었던 시인 기욤 드 마쇼를 상징적인 아버지로 승격시키며 스스로를 "대가 기욤 드 마쇼의 조카(nepveux de maistre Guillaume de Machault)"로 칭하는 외스타슈 데샹의 사이에 놓은 거리만큼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것은 동시에, 이 '작자'(作者, faiseur)들이 만들어낸 것이 공연이나 유흥거리에서 책 그 자체로서 수용된 것과 평행하게 일어난 변화이다. 그 과정에서 이 '책'과 삶 사이의 거리가 무너져 내린다. 저자는 샤를 6세에 의해 창시된 사랑의 궁정, 사랑에 대한 이론을 '궁정풍 사랑(amour courtois)'로 체계화시키고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역할 유희를 맡겨 결국 칭송과 명성을 추구하게 만들었던 이 가상의 궁정을 묘사하며 이것이 "삶과 문학을 동일시함으로써" 한 사회의 "교의적인 통일성을 유지"(91쪽)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이 장(章)은 "책에 대한 사랑, 문학에 대한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끝맺으며 이 둘을 포개놓는데, 그 둘 사이의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동의어처럼 여겨졌던 시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성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르킬리니툴레는 이렇듯 몇 가지 개념 틀을 가지고 중세의 글쓴이들이 만들어낸 알레고리들을 이리저리 나누기도 하고 다시 조립하기도 한다. 크리스틴 드 피장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그것은 "제각기 섬세한 상상력에 따라 갖가지 도안을 만드는 자수 놓는 이가 비단실, 황금, 그 밖의 재료들을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듯이 (…) 내가 목적한 바에 소용이 되도록 적재적소에 재료들을 적용"(<샤를 5세의 여러 행적과 미풍양속에 대한 책> 재인용, 106쪽)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책을 집어든 이들은 우선 풍성하면서도 섬세하게 배치된 이미지들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재료들을 '적재적소에 적용'하게 만든 저자 내면의 질서가 도대체 무엇일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부친들(pères)"(즉 위계)에서 여러 "쌍들(pairs)"(209쪽)로의 이행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4세기는 가족 모델이 "갖가지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들 혹은 정신적이고 지적인 삶의 범주들"(230쪽)을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준거를 제공하고 있으면서도,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게 되"(228쪽)었다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는, 정치적(내전의 혼란) 종교적(아비뇽 유수) 언어적(라틴어의 권위 해체) 신성 상실의 시대에 대한 우수에 점령된 시대이다. 모든 확신과 그 준거가 시간과 함께 해체되어 가는 시대를 포착하기 위해 저자는 곤죽 되어 뒤엉켜있는 언어들의 사이로 개념 틀을 서서히 저으며 한지(韓紙)를 떠내고 있는 셈이다.
그 사이로 마치 단말마의 비명 같은 문장들이 솟아오른다. 시인 질 리 뮈지는 탄식했다. "나는 내 시간을 잃어버렸네.(Je pierc men walesc)"(45쪽) 이 문장을 읽으며 잠시, 나 스스로가 이 시인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후대의 인간임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이 시대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기에 충분한 것인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삶, 글, 과거, 그리고 과거의 '아들'이 아닌 '쌍'으로서의 현재가, 마치 14세기의 수고본처럼 하나의 화면 안에서 조화롭게 조우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멜랑콜리의 색깔들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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