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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탐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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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달라붙은 '기생충'을 탐구하라!

[프레시안 books] 조광제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사르트르만큼 자주 언급되면서 잘 읽히지 않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그의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는 "성공은 거두었으나 거의 읽혀지지 않은 보기 드문 책"으로 꼽힌다. 사르트르가 제아무리 구체적인 예를 들이대며 진부한 관념론을 벗어나려 했어도, 700쪽에 이르는 '의식의 존재론'을 읽어내는 일은 작심하고 다가서도 어려운 '모험'에 가깝다.

조광제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그린비 펴냄)은 이 모험을 도와줄 요긴한 책으로 보인다. 철학아카데미에서 지난 2년간 진행된 <존재와 무> 강의를 펴낸 두 권의 묵직한 책은 우선 원저의 충실한 독해를 목표로 삼고 있다. 저자는 <존재와 무>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며 자세한 설명과 흥미로운 해석으로 사르트르의 사유를 입체적으로 펼쳐 보여준다.

▲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I>(조광제 지음, 그린비 펴냄). ⓒ그린비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앞선 철학자들의 영향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동시에 그들 사유의 한계를 비판하는 일로 자신의 철학을 세워나가기 시작한다. 때문에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철학사의 거목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프로이트 등- 의 논지를 요령 있게 분간해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후설의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저자의 이력은, '현상학적 존재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존재와 무>를 풀어내는 일에 더없이 안성맞춤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사르트르의 책에서 간단없이 발견되는 중요한 사유를 현대의 사상에 유연하게 연결시킴으로써 고전 읽기의 '모범답안'을 제시한다. 존재와 비존재를 망라하는 사르트르의 '실재' 개념이 라캉의 실재와 많이 닮아 있다는 지적(I권, 96쪽), 시선과 타자론으로부터 푸코의 생체권력과 권력관계 그리고 '판옵티콘' 구조를 연결하는 일(I권, 593~599쪽), 타자로부터 발생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을 레비나스와 비교하는 일(I권, 600~602쪽) 등은 흔히 '단절'과 '부정'으로 표현되던 사르트르와 구조주의(혹은 후기구조주의)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창조적 오독"을 "독특한 해석"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존재와 무>의 한계를 적시하고 이견 또한 분명히 내놓는다. 예컨대 "몸이 없이는 대자의 의식이 성립할 수 없다"는 사르트르의 '몸 이론'이 메를로퐁티의 '살 존재론'을 선취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몸과 의식의 발생적인 관계를 제대로 천착하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다.(II권, 107~139쪽). 행위(함)가 소유(가짐)로 환원된다는 '전유의 종합'에 대해서는 예술작품의 탈도구성을 내세우며 사르트르와 각을 세우기도 한다.(II권, 626쪽)

원전에 대한 충실한 강해가 제일의 목표이긴 하지만, 모든 읽기와 마찬가지로 조광제의 사르트르 독해 또한 하나의 관점을 가진다. 저자는 "<존재와 무>가 단순히 의식과 물질에 대한 극단적 이분법에 기초한 책이 아니라, 존재와 무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탈근대의 사유를 시작한 책"이라는 생각을 사르트르 독해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사르트르를 "감각적 유물론에 입각한 현존주의자"로 보는 하나의 입장으로 귀결한다.

"사르트르는 헤겔처럼 존재를 본질에 종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 오히려 존재가 본질의 토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여기에서 이른바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헤겔을 거쳐 후설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철학적인 사유가 끝나고, 하이데거를 거쳐 사르트르를 통해 이른바 탈근대적인 사유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핵심은 본질 대신에 현존, 현존과 본질의 대결을 넘어서 '불투명한 심연으로서의 존재'를 철학적 사유의 근본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I권, 107쪽)

<존재와 무>의 저자가 존재와 무, 사물과 의식,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등의 이분법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충만한 존재'에 마치 '과일 속의 벌레'처럼 기생하며 자신의 '무'를 부정하고 초월해가는 의식의 존재론적인 현실이다. 조광제는 "무는 기생충처럼 존재의 심장에 붙어 있다"는 사르트르의 언명에 집중하고 이로부터 전개되는 대자존재론을 꼼꼼하게 정독해간다.

즉자를 대자적인 방식으로 변양해가는 것이 '행동'이며, 행동은 즉자를 현존하게[실존하게exister] 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활동임을 밝히면서, 이것이 곧 본질론을 벗어나 현사실성[사실성facticité]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기획투사[기투projet]할 수밖에 없는 대자적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현존[실존existence]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저 유명한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안에 표기한 말들은 기존에 통용되던 역어이며, 현사실성, 기획투사, 현존 등은 조광제가 제안하는 새로운 역어이다.)

저자는 사르트르의 '실존'을 '현존'으로 고쳐 말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철학에서 핵심적인 하나의 용어에 대해 그 쓰임의 역사를 함부로 무시한다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좀처럼 자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이 경우만은 "어쩔 수 없다"는 점을 누누이 설득한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II권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논문에 잘 드러난다. 저자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을 비교한 뒤, 의식을 철학의 중심에 놓는 사르트르는 "하이데거보다 후설에 더 충실"하며 그의 의식존재론이 결국 하이데거식의 '실존'보다는 후설에서의 '현존'에 더 적합하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르트르가 후설의 현상학에 매료되었던 것은 일체의 관념적 가치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기술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현상학은 그에게 무엇보다 '방법론'으로 다가왔고, <존재와 무>에 이르는 초기의 저술들은 모두 '현상학적 기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나온다. 사르트르는 당시 프랑스 학계의 "질식할 듯한 관념론과 과학적 실증주의"로부터 벗어나 '사물들 자체'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러나 곧 현상학의 "지나치게 관념적인" 방식은 "시대의 분노와 소음이 난무하는" 현재를 그려내기에 부적합해 보였고, 이러한 반성은 하이데거를 통한 "좀 더 감동적이고 영웅적인 형이상학"으로 선회하게 된다. "인간현실에 정박한" 존재론을 위해 현상학의 비-시간적, 무-시간적 세계를 벗어난 것이다.

만일 사르트르가 existence를 하이데거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설정했다면 다른 용어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보다는 기존의 용어로부터 그 외연을 확장 혹은 변형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동일한 용어가 철학자마다 다른 의미와 외연을 가지며 달리 사용되는 전례는 종종 나타난다.

게다가 현존주의라는 말에는 언뜻 '현재'만이 강조되는 느낌이 든다. 시간성을 "대자존재가 자기를 이루어가는 내적구조"로 보는 사르트르에게 시간의 세 차원이 맺는 동적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미래를 중심으로 시간성을 이해하는 하이데거와 달리 사르트르는 시간성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통일된 총체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유물론자 사르트르'를 부각시키는 저자의 또 다른 시각은 사르트르(의 사유)를 하나의 술어 안에 가두는 듯이 보인다. 인간의 의식은 '무'이며, 오로지 즉자존재인 사물에 의해서만 존재를 부여받는 대자라는 사르트르의 주장에는 분명 '의식에 대한 존재의 우선성'이 있다.

그러나 '무'인 의식이 마냥 사물존재에 기생한 채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무는 존재에 대하여 사후성을 지닌 수동적인 것이지만 논의가 진행될수록 이 무가 수동적 의미에서 벗어나 능동적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된다. 무는 그저 존재로부터 태어나 존재에 부수되는 종속적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더 나아가 존재를 에워싸고 압도함으로써 존재의 여건을 이루는 또 하나의 존재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인 상태로 있지 않는 한에서 나는 있다'는 것이 사르트르가 규정하는 대자적 인간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이 타성적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는 한, 사르트르를 유물론자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더구나 <유물론과 혁명>(1946)에서 "인간의 주체성을 거부하고 인간을 물질적 대상으로 환원하는 형이상학적 선택이 유물론의 본질"이라며 유물론을 거세게 공격했던 사르트르를 기억한다면 더더욱 조심스러울 일이다.

반론제기를 서평자의 임무로 착각하여 어설픈 지적을 하긴 했지만, 이것이 이 책의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의의를 가리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방대한 <존재와 무>를 시종일관 정밀한 독서와 적확한 해설로 완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이 갖는 의의는 차고도 넘친다. 이것을 시작으로 우리 철학계의 부진한 사르트르 연구는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비판적 독서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사르트르에게서 걸러낸 '즐거운 발견'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준 저자의 열정은 우리를 <존재와 무>의 독서로 유혹하건만, 정작 <존재와 무>의 '읽을 만한' 번역본을 구할 수 없다는 건 분명 함정이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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