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서 아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맞자, 노동자 부부 오토와 안나 크방엘은 나치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엽서에 반(反)히틀러 메시지를 적어 통행인이 많은 건물에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나 2년 동안 뿌린 276통의 엽서는 18통을 제외하고 고스란히 게슈타포의 손으로 들어갔고, 크방엘 부부는 투옥됐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베를린의 한 노동자 부부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저질렀던 불법 행위에 관한 게슈타포의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편집자> |
발터 벤야민의 동시대인 작가 루돌프 디첸(저자 한스 팔라다의 본명)은, 한 가지 의미심장한 오해에 기초해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 <누구나 홀로 죽는다>(이수연 옮김, 씨네21북스 펴냄)를 집필했다. 이 작가의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인물'들에게로 향해 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의 심층에 숨어 있는 주인공은 엽서와 경마라는 두 가지 사소한(?) 사물이다. (전면에 나타나는 주인공 부부를 제외한)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은 비유컨대 마치 결혼식의 하객들처럼 엽서와 경마라는 기묘한 한 쌍의 주인공을 둘러싸고 서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물론 엽서와 경마라는 두 개의 알레고리는 결코 사이좋은 관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양자 사이의 격렬한 대립이 이 허구 세계 전체를 지탱하는 중심축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는 두 알레고리 사이의 뒤얽힌 관계를 명확하게 해명하는 데서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오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한스 팔라다는 소설 말미에 붙인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토 크방엘과 안나 크방엘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듣는 사람 없이 소멸되었고, 가망 없는 싸움에 헛되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완전히 가망 없었던 건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786쪽)
| ▲ <누구나 홀로 죽는다>(한스 팔라다 지음, 이수연 옮김, 씨네21북스 펴냄). ⓒ씨네21북스 |
이것은 나치 통치하의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잔뜩 웅크린 채 안으로 안으로 썩어가고 있을 때, 저항의 구호를 담은 엽서를 (불특정 개인에게) 은밀히 배달(?)하는 무모하고 기발한 행동을 보여준 크방엘 부부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 논평이다. 그러나 여기가 바로 작가의 근본적인 오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문제는 (인간이라 불리는 주체의) 저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의 뒤표지에는 "베를린의 노동자 부부, 엽서 한 장으로 나치에 대항하다"라는 홍보 문구가 박혀 있는데, 이 역시 작가의 오해와 동일한 오해다.
이런 식의 오해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특수한 악에 대한 개별적이고 우발적인 저항을 아무런 논리적 성찰 없이 곧바로 선과 악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우주론적 사태와 동일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나치가 제아무리 악했다 해도, 그것은 결코 악 일반과 등치될 수 없다. 우리를 경악하게 만드는, 이 세계의 모든 개별적이거나 집합적인, 혹은 크거나 작은 악들은 우리가 선망하는 지고한 선의 가치들만큼이나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이미 악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들은 모두 악의 현상 형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미 작가 스스로가 작품 속에 새겨 넣은 두 개의 결정적인 문장―판결문―이 그의 소박한 생각(오해!)에 '저항'하고 있다. "카를과 트루델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인생은 파멸 당했다."(597쪽) 우리는 이 두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오토와 안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파멸 당했다." ("그런데도"와 "그리고" 사이의 차이는 실로 심대하다.)
파멸 당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다만 파멸의 형식과 양상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우연에 의해 파멸 당하고, 파멸 당한 타인의 악의와 폭력에 의해서도 파멸 당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만 파멸 당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존경하거나 경멸하는 가치들 역시 파멸 당한다. 그리고 가치의 파멸이야말로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가치의 파멸, 그것이 곧 세상의 운명이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자에게 우리는 다만 이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다. "당신에게는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 때문이라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오토와 안나 부부의 이른바 '저항'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래에서 밝혀지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런데 그들이 저항/대항한 것은 사실 나치가 아니라 경마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 그들 스스로는 몰랐지만, 그들이 쓴 엽서는 경마에 대한 사형선고였다.
<누구나 홀로 죽는다>에서 경마의 권력은 에노 클루게라는 인물을 통해 거의 완전한 형태로 구현되고 있다. 다시 말해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가히 초월적이라 할 만하다. 에노는 이 세상이 악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악이 가진 무서운 권력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한 상태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나치와 게슈타포가 주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잔인하게 찢고 뭉개는 상황에서도, 나치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제 아들이 괴물로 변하는 것을 보고도, 심지어 한때 사랑했던 아내에게 죽은 개 취급을 당해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경마뿐이다. 경마를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는 괜찮은 세상인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에노는 너무나 경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경솔함은 생각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한 결과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370쪽)
이 진술은 부정확하거나, 좋게 보아도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 무관심해서 경솔한 것이 아니다. 에노 클루게는 경마에 미쳐 있기 때문에 경솔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마는 무엇인가? 이 소설에서 표현된 경마는 세계 자체가 악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힘, 즉 근본악의 알레고리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가 오토와 안나 부부의 엽서라고 한다면, 그들의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는 그들을 추적, 체포, 억압한 나치 체제(와 게슈타포)가 아니라 바로 에노 클루게의 경마이다.
그리고 근본악의 하수인인 에노 클루게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 아니 그가 경마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이는 다름 아니라 오토와 안나의 엽서에 무섭게 집착했던, 그리하여 마침내 엽서의 신봉자가 된 게슈타포 경감 에셰리히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그래도 내가 오토 크방엘, 당신의 유일한 추종자입니다!"(569쪽))
정확히 말해서 오토와 안나의 '저항' 행위가 근본악에게 죽음을 선고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행위는 이 세계의 부분적인 악이 근본악을 폭로하게끔 만들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의 원리에 의지해서 엽서를 배달한 덕분이다. 즉 그들은 우연이라 불리는 이 세계의 악마성을 (무의식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악의 원리를 이용해 악을 부추겨서 근본악을 폭로한 것, 이것이 오토와 안나 부부가 행한 저항의 실제적인 의미다.
다시 말해 그들의 엽서쓰기는 특정한 악에 대한 무기력한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계의 근본악의 가면을 벗겨내는 동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세계=악과 근본악에게 완벽한 죽음을 언도한 주체는 사람의 말이나 행위가 아닌, 엽서에 쓰인 (신적인) 문자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 확증된다. 아마추어적인 필적감정학을 동원하면서 엽서를 쓴 장본인이 아니냐고 추궁하는 게슈타포에게 오토 크방엘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런 거 모릅니다. 내가 무슨 성경에 나오는 유대 율법학자도 아니고."(556쪽)
여기서 크방엘은 아무 이유 없이 유대 율법학자를 들먹거린 것이 아니다. 엽서에 저항의 구호를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갈 때 그가 보여준 태도는, 신의 거룩한 말씀-문자를 필사하는 경건한 유대 랍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경외의 태도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나치라는 부분악이 아니라 에노 클루게가 구현한 근본악의 세계에 정의로운 신의 판결을 전하는, 아니 그것을 받아 적는 서기였던 셈이다.
그렇게 보면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 직전 마지막 순간을 동행한 나치의 파견 목사와 오토 크방엘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더없이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너무나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오토 크방엘 때문에 당혹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 성마른 목사는 무기력하게 '경마'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만다. 즉 악에 봉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 자신이라는 사실, 제 앞에서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내는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정의로운 말씀을 받아 적는 필사가라는 사실을 전혀 짐작조차 못한 채 그를 위해 공허한 기도문을 외우는 이 목사는 말하자면 에노 클루게의 분신인 셈이다. 그러므로 삶의 어느 길목에서든 그는 오토와 안나가 쓴 엽서를 만나 완벽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누구나 홀로 죽는다>는 작가의 오해에 기초해서 축조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오해는 한층 더 깊은 진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오히려 유익한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는 모든 존재는 동시에 악에 속한다는 사실, (나치와 같은) '저들'의 분명한 악은 언제든 '우리'의 애매한 악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 근본악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거룩한 문자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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