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베르토 볼라뇨, '8월 20일', <제3제국>(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펴냄), 10쪽.
볼라뇨의 사람들은 대개 일기를 쓰거나 혼잣말을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적거나(<야만스러운 탐정들>(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제3제국>) 말하는 데 심취한(<칠레의 밤>(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부적>(김현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들은 그저 적고, 말한다. 적을 수밖에 없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일 터인데, 이렇게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데 여념이 없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 들을 수 없다 - 는 것으로, 볼라뇨의 사람들은 '일기'와 '독백'이라는, 이를 공식적으로 허락하는 장치를 가진 셈이다. 볼라뇨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대개 망명자들이며, 떠돌아다니며 삶을 사는 이들은 자연히 자신의 삶을 기록해둘 물리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
| ▲ <제3제국>(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그러던 어느 날 밤, 찰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우도는 결국 코스타 브라바에 남아 있기로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나날이 증폭되어 가는 가운데, 우도는 문득,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이 '게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향해 치닫고 있음을 깨닫는다.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피 끓는 시절을 겪고 여생을 스페인의 남쪽 해변 마을 블라네스에서 지내다 2003년 세상을 떠난 로베르토 볼라뇨는, 그의 언어 스페인어를 모국으로 삼아 살며, 자신이 보고 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파란만장한 정치 사회사를 일견 간접적인 듯 직접적으로 작품화해 왔다. <제3제국>은 그의 유작이자 1989년에 쓰인 초기작으로, 2008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볼라뇨의 미출간 원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공개된 후 2010년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이어 2011년 영어로 출간된 소설이다.
이 소설의 경우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 대신 그 제목대로 제3제국, 즉 나치 통치 하의 독일이 주도했던 제2차 세계대전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게임판을 빌어 재현한다. 실제로 집필 당시 볼라뇨는 전쟁 보드게임 마니아였고, 제2차 세계 대전사를 꿰뚫고 있었다고 한다.
작가의 서랍 속에서 발견된, 즉 작가가 굳이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내놓지 않은 글을 펴내고 읽는 것은 언뜻 잔인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했던 저 유명한 부탁처럼 볼라뇨가 이 소설을 부디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특별히 당부했던 것은 아니며, 게다가 보르헤스의 허를 찌르는 지적에 따르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펴내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글을 남기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한 - 이렇게 다시 옮겨 적고 보니, 어쩌면 비겁하기까지 한 - 행위이다. 결코 출간되어서는 안 되는 원고라면 이를 쓰자마자 작가 스스로 이미 파기했을 것이므로. 그러나 볼라뇨는 이 원고를 타이핑한 후 다시 연필로 꼼꼼히 교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볼라뇨는 문학이라는 미명의 배를 째고 머리를 들이밀 줄 아는, 그럴 줄 알 뿐 아니라 그렇게 행했던, 배짱 두둑한 작가였다. 모르긴 몰라도, <제3제국>은 언젠가 결국 책이 되었을 글이었다.
게임판 위 세상은 순차적으로 펼쳐진다. 그러다 한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한눈에 들어올 때는 대개 그 판도가 어느 정도 결정되고 만 상태다.
| ▲ <칠레의 밤>(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또한 보다 '큰 세상'에서도 통제할 수 없는 일이 하필 맞물려 벌어진다. 휴양지에서 알게 된 (조증으로 보이는, 역시 다분히 초현실적인) 친구 찰리가 행방불명되고 불길한 짐작대로 사체로 발견되는 일련의 과정은 게임판 위 우도의 처지와 흡사하다. 더불어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에 유령처럼 서식하고 출몰하며 그를 지켜보는, (역시 초현실적인) 병든 자의 불편한 기운. 그러니 우도는 이중의 악몽에 시달린 셈이다. 초현실적인 세상과 현실적인 게임, 그 크레바스에서.
결국 독일은 진다.
결국 챔피언은 스러진다.
"내 삶도 나아졌는가? 물론이다. 잉게보르크를 알게 됐고 이제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 친구들과도 깊고 흥미로운 우정을 쌓았다. 콘라트 같은 친구만 하더라도 형제나 다름없으며 그는 이 일기도 읽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고 큰 포부도 있다.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이젠 성장기 시절에 흔히 느끼던 지루함도 없다. 콘라트는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건강하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 말에 따르면 내 건강은 최상인 셈이다. 솔직히 지금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 같은 책, 10쪽.
<제3제국>은 이렇듯 정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누구나 두려워할 법한 일을 겪었던 한 청년의 일기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볼라뇨가 허구적으로 쓴 거대한 일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일기란 어떤 사건이 일어난 어느 날의 대목이 특히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날들의 기록들이 축적되어 한 사람의 일기를 이루는 것으로, 이는 평생을 요하는 작업이다. 모든 날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볼라뇨의 모든 소설이 바로 그러하다. 더불어 날들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살아가는 가운데 어느 날의 사소했던 일이 시간이 흐른 후 불현듯 감당하기 버거운 덩치로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청년 우도는 의외로 의연하다. 그는 나락에서 홀연히 공중 부양을 한다. 돌연 제3자가 되어 자신이 집착했던 세계 바깥에서 관조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고는 게임 대회를 어슬렁거리다 "발표자의 80퍼센트가 정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너무도 올바른 이러한 태도에 일단 막연한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지루하게도, 정신을 차려버린 것일까?
그럴 리 없다.
그의 건강은 최상이었다! 그는, 이미 지루함과 맞서 겨루어 이겨내 본 적이 있는 자다.
"(…) 찰리가 나한테 좋아하는 운동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혼자 달리기."
- 같은 책, 26쪽.
그의 일기는 끝나지 않은 채 끝난다. 결말을 매듭짓지 않는 쪽을 택한 볼라뇨는 이 일기의 마지막 글에 날짜를 적지 않았다.
우도는 일기를 계속 쓰게 될까?
다시, 일기장을 들춘다.
그의 일기에는 날짜만 존재한다. 즉 일기가 쓰인 연도는 명시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어느 해 8월'은, 어느 순간 전쟁의 시간으로 변모해 있다. 1940년, 1941년, 1942년 가을과 겨울, 1944년 봄, 그리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다만 두려운 시간을 향한 기록.
그는 대체 왜 일기를 쓴 것일까?
"나는 왜 가끔씩 그리 두려움이 많을까? 왜 두려움이 커질수록 생각이 부풀고 떠올라 저 높은 곳에서 지구 전체를 내려다보는 걸까?"
- 같은 책, 101쪽.
"나는 게이머를 생각했다. 누군가가 높은 곳에서 그의 머리, 어깨,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내려다보는 게임판과 게임말은 수천 번의 시종이 영원히 전개되는 무대이자 만화경 같은 연극이며 게이머와 그의 기억, 욕망이자 시선인 그 기억을 잇는 유일한 다리이다."
- 같은 책, 279쪽.
내려다보기. 해변을 낀 휴양지를 찾은 우도는 굳이 산장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다. 또한 우도의 말대로, 게이머는 게임판을 내려다본다. 우도처럼, 기록자는 일기장을 내려다본다. 우도는, 볼라뇨는, 그렇게 삶을 내려다본다.
전체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앞에 선 자. 그 공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까?
| ▲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호르헤 볼피 지음, 박세형·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 호르헤 볼피 외,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박세형·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49쪽.
볼라뇨는 생의 바닥을 긁은 인물들에 천착한 작가다. 이를테면 1968년 9월 멕시코시티의 국립 자치 대학교 유혈 사태 한가운데 13일간 화장실에 숨어 지냈던 우루과이 출신의 <부적> 속 여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와 같은 이들. 그리고 영원한 문학적 무정부주의자였던, 그 자신과 같은.
다시 쓴다.
볼라뇨는, 생의 바닥을 긁어본 이들, 이어 그 바닥에 계속 머물러 있든 공중 부양을 하든 어쨌든 이미 바닥을 긁어보기는 긁어본 이들, 에 천착한 작가다.
또한 짐작건대 바닥을 긁어보게 되도록 태어나는 사람들은, 살아남는 법 또한 이미 체득한 채 태어나는 듯하다.
적어도 볼라뇨의 인물들은, 우도는 그러했다. "게임판 위의 완벽성"이 곧 "죽음"이고 "공허"임을 알았던 그는, 사실 아래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지극히 솔직히 적고 있다 - 그러고 보니, 일기의 본령은 솔직함이다. 우도는 나중에 친구가 자신의 일기를 읽어볼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솔직함에 충실했다.
"(…) 이 일기의 첫 장을 읽어 봤다. 갓 시작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매일의 일과와 생각을 기록하는 것을 일상적이고 의무적인 혹은 의무에 가까운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나 같은 사실상의 독학자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이미지에 성의 있고 주의 깊게 집중하여 기억을 되살리고, 특히 이미 완성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기질로 발전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씨앗에 불과한 자신의 감수성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콘라트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 일기의 애초 목적은 훨씬 실용적인 데 있다.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갈수록 많아지는 전문 잡지에 실릴 내 글이 불완전한 문장과 비문 때문에 그 성과가 실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8월 21일', <제3제국>, 17~18쪽.
"그는 (…) 앞날을 위해 하루 일을 기록하고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며 일기를 쓰라고 권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하려는 일이다."
- 같은 책, 20쪽.
솔직한, 현실적인, 우도는 계속 일기를 쓸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
"게임판 위의 완벽성"이 곧 "죽음"이고 "공허"임을 알았던 그는,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완벽한 삶이 두렵기 때문이다.
다시, 휴가의 시작.
평소 악몽을 자주 꾸지 않는다던 우도는 휴가를 떠나온 지 사나흘 만에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꿈속에 등장한, 그 여자 친구가 읽고 있는 심심풀이용 탐정소설의 주인공 플로리안 린덴의 경고.
"빨리 나오시오. 당신들 큰 위험에 빠졌소."
- 같은 책, 86쪽.
| ▲ <부적>(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
혹,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니라, 악몽을 꾸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아닐까?
"콘라트는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건강하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 말에 따르면 내 건강은 최상인 셈이다. 솔직히 지금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 같은 책, 10쪽.
콘라트는 틀렸다. 그의 친구는, 지루해하지 않아 건강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친구는 병들어 있었고 이제야 건강해졌다.
두려워할 줄 알게 된 이제.
누구든 종내 피해갈 수 없는, 그러나 볼라뇨의 사람들이라면 굳이 마다하지 않는, 심지어 때로는 성큼 다가서는, '악몽'으로의 여정. <제3제국>은 볼라뇨 후기작 특유의 매력들 - 횡설수설하는 인물들, 얽히고설킨 구조, 방대한 상호텍스트성 등 - 을 찾아보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다분히 직선적으로 흘러가는, 그리하여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읽기 쉬운 미덕(!)을 지닌 작품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그 정교하지 않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선 엄연히 존재하는 볼라뇨 '일기'의 한 부분으로서, 이는 이미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에는 그 자체의 생명력이 있을 것임을 우리는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더불어 이는 망명자들 - 볼라뇨와 그의 사람들, 게다가 우리들 - 이라면 자연히 체득해왔을 지점이다.
"망명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천히 또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조금씩 작아져서 자신의 진정한 크기를 획득하는 것이죠. (…) 모든 작가는 문학에 뛰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모든 독자는 책을 펼쳤다는 것만으로 이미 망명자입니다."
- 로베르토 볼라뇨, '망명', 에세이집 <괄호 치고(Entre Parenthèses)> 중에서
나아가, 또한 이미 확인한 바, 볼라뇨의 사람들은 완벽한 삶을 두려워하는, 그리하여 기꺼이 나락을 택해 떨어져보는 이들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리 두려워할 일은 없어 보인다. 삶이, 어디 한 번이라도 완벽한 적이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배짱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던 로베르토 볼라뇨가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방식이다.
PS. 이 글에서 언급된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들은 국내 출간작을 기준 삼았음을 밝힌다. 사실 <제3제국>은 1993년 출간된 볼라뇨의 공식적인 첫 소설 <아이스링크>와 여러 모로 연결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조만간 <아이스링크> 한국어판이 출간되고 나면, 또한 서로 교묘히 연결되어 있는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이 모두 출간되고 나면, 또 다른 말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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