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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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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미주알 고주알' <5>

오스카는 왜 양철북을 두드렸을까?

설날 새벽까지 소설 원고를 썼다. 원고를 쓰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왜 이것을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 였다. 그러니 자연 쓰는 시간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도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순간, 더는 아무것도 쓰지 못하리라는 것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당신은 왜 쓰는가?'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이지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다짜고짜 한 대 패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는 짐짓 우아한 척 폼잡고 이렇게 되묻는다. 당신은 왜 사는가, 라고.

이번 원고를 쓰면서 나는 꽤 고독했다. 고독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탓도 아니었고 또 원고를 쓰는 동안 외출을 하지도 전화를 받지도 않은 탓만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고독했다. 조금 과장을 하고 엄살을 떨자면 원고를 쓰기 전에 노트북 앞에 앉을라치면 그 혹독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우선 눈물부터 솟구쳤다.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고 누군가와 간절히 심야통화를 하고 싶었다. 내 책상을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아팠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 마리 르도네는 '글쓰기는 정신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격렬한 통증이 동반되는 육체적 현상이다'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번에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카프카의 그 처절한 심경의 고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존재는 진정으로 작업하는 책상에 달려 있다, 결코 책상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광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빨로라도 책상을 물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다고 내가 마리 르도네나 카프카 같은 놀라운 작품을 썼다는 건 아니다. 앞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창작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한 한 대개의 모든 작품들을 읽고 그 작품을 쓰는 동안 작가가 느꼈을 고독과 고통을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나는 짐짓 숙연해지곤 한다.

얼마전부터 나는 고전을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있어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시집을 새로 찾아 읽게 되었다. 그 책 안에는 분명 내가 그어놓았을 밑줄 같은 것이 여러 군데 그어져 있었고 여기엔 차마 밝힐 수 없는 유치하고 감상적인 메모들이 있었다. 시집을 다시 읽는 나는 그때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발견했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더불어 발견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시절의 '나'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내'가 아니었다. 그 뒤부터 나는 소위 '고전'이란 것을 다시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맨 처음 찾아 읽게 된 것은 일본 근대문학의 장을 열었다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들이다. 그는 일생동안 인간 존재의 고독과 불안을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을 이십대 때 읽은 것과 그리고 지금 서른 중반이 되어서 읽는 것은 매우 기묘한 차이가 있었다. 그만큼 내가 성숙했다면 다행이지만, 아무튼 청춘시절에 읽었던 것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달랐다.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나는 열한 권이나 되는 소세키의 작품들을 새로 다 읽어치웠다. 그리고나니 새로운 용기가 솟아 이번에는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게 된 것이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다. 새 원고를 쓰기 시작하느라 양철북의 절반쯤만 읽었고 내가 갖고 있는 비디오 테이프 '양철북'을 본 게 전부다. 아시다시피 양철북은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의 대표작이다. 폭넓은 서사, 끝없이 이어지는 무궁무진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익살맞고 재기스러운 화법들. 그리고 그 안에 품고 있는 알레고리와 시대적 상황들. 나는 이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다. 뒤늦게 들어간 대학시절에도 다시 한번 읽었다. 지금 내가 다 읽는다면 세 번째다.

나는 앞에서 창작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그 고통을 일부나마 알 것 같기 때문에, 이젠 누구의 작품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으며 내 기준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한편의 작품은 그것대로의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다소 막연하고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된다. 고전을 찾아 읽는 것은 뭔가 배울 게 있을까 봐서가 아니라 오래전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어떤 사명으로 작품을 썼으며 그 작품들이 지금 이 세기에도 어떤 이유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가를 새삼 발견하기 위해서다. 아니다. 그저 나는 좋은 작품을 읽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밖엔 없다. 좋은 고전은 한 가지씩의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화두(話頭)와 같은 것이다. 처음엔 풀 수 없는 어떤 겹겹의, 그러나 꼭 풀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공안(公案)처럼 느껴지지만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고전의 힘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직도 한권의 책이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믿는 진지한 세대에 속한다. 그러므로 누군가 새로 책읽기를 원한다면 우선 좋은 고전부터 권하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창작의 고통 운운한 것은, 그저 이 짧은 글 또한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짓 엄살을 떨어보자는 얕은 심사였다. 어쨌거나,

그러고 보니 나는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스카는 왜 그토록 양철북을 두들겨댔을까? 이 질문은 이번 내 소설 원고를 쓰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바늘처럼 자꾸만 나를 찔렀다. 다른 사람들은 그 해답을 알고 있을까? 정말이지, 오스카가 왜 양철북을 두드렸는가? ……그 해답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건 파우스트의 '이 세상의 그 가장 안쪽을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양철북의 오스카를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두렵다.

* 사족이지만 덧붙인다. 그라스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나는 글을 쓸 때에,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자주 다음과 같은 의식에서 쓴다. 원했던 또는 원하지 않았던 간에 우리와 함께 살아남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쓰는 기분으로 말이다' 라고.
나는 이것이 '작가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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