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국회에서는 예산심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행정부에서 확정하여 국회에 보낸 내년 예산규모는 총 112조, 그러나 이것은 일반회계만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별회계나 각종 기금까지 포함하면 150조를 넘어선다. 국가예산은 이처럼 규모가 큰 만큼 그 내용과 수립절차도 대단히 복잡하여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국가예산 편성 및 집행과정에서 국민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그 예를 들자면 수도 없이 많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자.
창고에 페인트가 그득했다. 이를 본 기관장이 다음 해에는 페인트 예산을 반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부하 직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만일 다음 해에 페인트 예산을 제로로 해놓으면 그 이후부터는 다시 배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산편성시 ‘계속사업’만 살려 주고, ‘신규사업’은 불허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식구조 조사를 위한 용역비가 한번 예산에 반영되고 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년 연구용역비를 딸 수 있다. 하지만 새로이 청소년 교육사업을 하려 해도 예산 확보가 어려워 포기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연구용역비를 교육사업으로 돌리면 안되나? 기본적으로 안 된다.
***대통령도 속아 넘어가는 예산편성**
정부 예산과 관련해서 국민뿐만 아니라 대통령도 속아 넘어가는 일이 적지 않다. 과거 어느 대통령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관련 예산을 몇% 증액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실제로 예산 편성을 하다 보면 그게 잘 안 된다.
예산 편성 초기 단계에서는 과학기술예산을 대통령의 지시대로 증액한다. 그러다가 다른 부문 특히 지역개발사업 부분에서의 예산요구가 거세게 들어오면 과학기술 예산이 밀리게 된다. 예산투쟁이란 게 원래 제로섬게임이 아닌가.
하지만 대통령께는 그대로 몇% 증액했다고 보고한다. 이것저것 끌어다가 과학기술예산이라고 짜맞추는 것이다. 대통령은 세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이 그 복잡한 예산을 어떻게 일일이 따지고 있겠는가.
그렇다면 청와대 비서진이 챙겨야 되지 않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예산관련 비서관들은 거의가 예산부처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문화대통령, 교육대통령, 과학기술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은 공염불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이 과학기술을 최우선 국가과제로 삼으려면, 과학기술 전문가를 과기부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 아니라 예산실장으로 임명해야 할 일이다.
***‘돈이 남는다, 빨리 써라’**
최근에 어느 실세 정치총리 때의 일이다. 이 분이 정치총리이다 보니 이전 총리들과 달리 외부 행사가 유독 많았다. 심지어는 소속된 정당의 행사까지 총리실 예산으로 치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관련 예산이 금새 바닥났다. 총리 행사는 해야지 예산은 없지. 궁여지책으로 예비비를 당겨올 수밖에 없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무슨 급박한 새로운 사업의 필요성이 발생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세 총리가 필요하다는데 무슨 말인가. 결국 전례 없는 예비비가 책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온 것이다. 돈 쓸 시간은 없는데 쓸 돈은 너무 많은 것이었다.
그러자 비상이 걸렸다. 돈을 써라. 빨리 돈을 써라. 기껏 어렵게 예비비까지 타왔는데, 돈이 남는다면 이건 감사대상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세상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남는 돈을 다른 사업에 쓰면 안 되는가. 안 된다. 지금의 예산제도 하에서 그 돈은 그 명목으로만 써야 하는 것이다. 행정부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정작 급한 일은 예산이 없어서 못하고, 이미 필요가 없어진 일은 예산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되풀이 하는 일말이다.
***해방 후 예산제도 그대로 답습**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예산제도가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이 과거의 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동안 계획 예산이니 성과주의 예산이니 제로베이스 예산이니 하면서 갖가지 선진 예산기법을 도입한다고 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경직적인 ‘전년도 대비의 항목별 예산제도’에서 한치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예산 편성의 기본틀이 전년도 어떤 항목에 얼마 책정되었는가를 보고 몇% 늘리거나 줄이는 식의 구조이기 때문에 금년 예산은 작년과 비슷하고, 작년 것은 재작년 것, 이런 식으로 해방 직후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정부개혁의 열풍이 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 정부는 결코 개혁되지 않았다. 고작 한 것이라고는 몇 차례 정부조직 개편을 했을 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드웨어만 건드린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가시적인 성과에 급급해서 우선 틀만 건드려 놓고, 정작 중요한 소프트웨어는 늘 뒷전이다.
***정부개혁의 핵심은 예산개혁**
궁극적으로 정부가 바뀌려면 ‘형태’보다는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 행태가 바뀌려면 소프트웨어가 바뀌어야 한다. 실제로 정부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의 예를 보면 정부조직개편 같은 작업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모두가 행정행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제도개혁 작업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제도개혁이라는 것도 거의가 예산개혁으로 요약된다. ] 이를테면, 모든 행정조직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예산제도의 경직성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나 그 해에 책정된 예산을 다 쓰려고 든다. 쓰다 남기면 다음 해의 예산이 삭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사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 어느 사업을 추진하다가 예산을 절약해서 남게 되면 다음 해에 그것을 쓰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인정해 주는 방법이다. 이러다 보면, 그 조직은 예산을 절약해서 쓸 뿐 아니라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성공한 정부들이 한 일이다. 제도를 바꾸니 행태가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먼저 예산 편성이나 집행에 대한 고도의 평가기술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신뢰의 문제다. 이 제도를 악용하다 보면 오히려 사태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특정 기관과 예산실 담당부서가 담합한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될 가능성이 많다. ‘모두가 다 해먹는 세상’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누가 나서서 이를 밀어 붙이겠는가. 결국은 미국의 저명한 행정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설파한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의 수준’이라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 사회의 신뢰의 수준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라도 시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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