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정파 하마스의 공격으로 약 1200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망하고 251명의 인질이 붙잡혀 갔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보복에 나섰고, 2023년 이후 지난 8월 30일(현지시간)까지 팔레스타인인 7만 3454명이 사망하고 17만 4486명이 부상을 입었다. 가자지구 인구가 약 210만 명으로 추산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10명 중 1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국제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보복의 정도를 넘어선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에 곳곳에서 인종 학살이라는 비난이 나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은 당사자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통설이 참혹하고 비극적으로 입증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잔혹성이 독일 나치,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은 일부 유대인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기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취재해 온 김재명 국제분쟁전문기자(정치학박사)는 최근 펴낸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통해 이러한 점을 짚는다. 나치 독일이 벌였던 대량학살은 나치만의 문제가 아닌, 독일의 많은 보통사람들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협력·참여했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이다.
즉 언제 어디에 모여 열차를 타라고 통지서를 전해준 말단 행정직원이나 수용소 행 열차를 몰았던 기관사들이 없었다면, 또는 중장년 시민들로 구성된 예비경찰대원들과 징집 명령을 받고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든 소슥적으로든 참여하지 않았다면, 대량학살 자체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김 전문기자의 진단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대량학살의 공범이 됐나'라는 부제가 붙었다. 김 전문기자는 이 책에서 전쟁 전에 '소시민'으로 살았던 보통사람들이 상황 변화에 따라 전쟁범죄의 공범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치의 대량학살에 눈을 감은 독일의 평범한 시민들의 방관과 침묵, 그리고 점차 학살자로 참여해 전쟁범죄의 공범자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 누구라도 학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히틀러, 젊은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
6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채워진 이 책은 크게 5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종교와 인종주의에 바탕을 둔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정서가 러시아에서의 학살(포그롬)과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의 원인이 됐고, 끝내는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특히 김 전문기자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젊은이들을 포함한 독일 보통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과정들에 주목했다.
"나치당이 세력을 키운 데에는 젊은이, 특히 대학생이 한몫했다. "대학생은 히틀러의 첨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1920년대에 조직된 '나치 학생동맹'은 히틀러가 내뱉는 반유대주의, 독일 재무장 등 과격한 정치 구호를 외치며 길거리 투쟁에 온몸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치의 집회가 열리면 어김없이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이들이 갈색 셔츠를 입은 돌격대와 함께 앞장섰다." (109쪽)
2부에서는 나치 히틀러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가한 폭력의 과정이 점점 거칠어지고 끝내 이우슈비츠 같은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독가스로 대량학살을 당하는 과정들을 살펴본다.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히틀러의 명령 아래 일으킨 '수정의 밤' 폭력 상황을 살펴보면서 특히 독일 보통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한다.
다수의 독일 시민들은 평소 비호감이던 유대인들이 겪는 굴욕과 고통을 그저 바라만 보는 '구경꾼'으로 남았다. 지은이는 독일 언론과 교회를 포함한 많은 독일인의 '침묵'이 대량학살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지적한다.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악의 평범성'
3부 전반부에는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나치 독일 지도부를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진행상황과 문제점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 김 전문기자는 연합군이 함부르크나 드레스덴 등 독일 도시의 주거지역들을 폭격해 60만 명 넘는 사망자를 낳았지만, 아무런 언급이나 처벌이 없었다면서 이른바 '승자의 정의'가 지닌 한계를 짚었다.
후반부에는 친위대 중령 출신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과 관련된 쟁점들을 다뤘다.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재판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라 주장했다. 유대인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인물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하다고 여기면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내놓았다.
유대인 주류사회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란 말이냐?"며 크게 반발했다. 김 전문기자도 아이히만이 냉혹한 악마이자 괴물이 아니라는 아렌트의 판단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악의 평범성' 개념에 뛰어난 통찰이 담겨 있다고 평가했다. 나아가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를 빌려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언급했다.
"나치 시절은 물론 21세기인 지금도 곳곳에서 보통 사람들이 '주어진 명령'에 이렇다 할 고민 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하다." (420쪽)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나치의 관청용어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히만의 무능력이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파국으로 이어졌듯이, 스스로의 행동이 어떤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생각해보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는 결론의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나치 피해 기억, 지금의 가해 행위에 면책?
4부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상품화하면서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챙기는 이른바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판적으로 다뤘다. 김 전문기자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독일인이 홀로코스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신나치류의 주장은 일본 극우파의 망언과 닮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김 전문기자는 2024년 <일본의 전쟁범죄>를 출간한 바 있는데, 일본의 극우들은 "난징 학살은 없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는 등 과거사를 부정하고 있다.
홀로코스트 왜곡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으로 김 전문기자는 홀로코스트 배상금 배분을 둘러싼 잡음을 꼽기도 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 생존자에 지급돼야 할 배상금이 유대인 단체와 임원들에게 훨씬 많이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노먼 핀켈슈타인(전 드폴대, 정치학) 같은 연구자는 홀로코스트를 이용해 잇속을 챙기는 행태를 '홀로코스트 산업'이라 비판한다. 핀켈슈타인은 유대인 주류에 밉보여 대학에서 퇴출되는 등 피해를 입었는데, 김 전문기자는 누군가의 거짓말이나 사기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과 유족들에겐 2차 가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5부의 앞부분에서 김 전문기자는 법망을 빠져나가 처벌을 비껴간 수많은 '작은 나치'들을 독일이 뒤늦게나마 심판대에 세우는 작업들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전범 처벌은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하나의 역사교육 현장이고 바람직한 기억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만이 아니다. 소련군 포로나 비유대인들도 많이 나치에게 살해됐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일반명사인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영문 글자를 소문자(h)로 시작하지 않고 고유명사인양 대문자(H)로 바꿔 쓰고, 심지어 히로시마와 드레스덴 등 대량 희생자를 낸 지역과 아우슈비츠를 함께 묶어서 입에 올리지 말라고 고집한다. 김 전문기자는 박노자 오슬로대학교 교수(한국학)가 "홀로코스트는 단수가 아닌 복수(複數)"라고 했다면서,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독점하려는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후반부에서 김 전문기자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우린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이라며 마치 면죄부처럼 지난날의 '피해 기억'을 내세우는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유대인이 나치의 피해자였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런 일이 되풀이돼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나치로부터 박해받은 희생자라는 '피해 기억'과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벌여온 '가해 행위'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가폭력을 저질러왔다." (583쪽)
당신도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는 '보통 사람들도 전쟁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실제 이러한 '악의 평범성'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발견됐다. 김 전문기자는 1968년 베트남 미라이 학살사건, 2004년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인권침해사건을 꼽으면서 평범한 군인들이 전쟁범죄의 공범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더불어 평범한 많은 독일인들이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전쟁범죄의 공범이 된 부분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김 전문기자는 발칸반도의 내전에 휩쓸렸던 평범한 회사원들, '피묻은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도끼로 손목을 치는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시에리리온의 소년병들을 현지 취재 과정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그들의 전쟁범죄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우리역시 제주 4.3이나 광주 5.18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경험했다.
그런 측면에서 '당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이 책의 경고는 정치적으로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현재의 한국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나와는 다른 타자'를 공격하라고 선동하는 지도자들을 만난다면, 평범한 일상을 사는 보통 사람들 중 누구도 하루아침에 학살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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