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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 보다 멀리 있는 '너'의 '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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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 보다 멀리 있는 '너'의 '잠'의

[프레시안 books] 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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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소설가 S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페렉의 <자는 남자>(어감의 문제에 있어, 나는 지금도 '자는 남자'라는 제목에 더 끌린다)를 제본해 준 적이 있다. 당시 번역되어 있던 페렉의 <사물들>(김명숙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과 <인생 사용법>(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그리고 모 계간지에 실려 있던 페렉의 단편 '겨울 여행'을 찾아 읽으며 페렉의 세계에 다소 빠져 있었기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잠 속으로 급속도로 빨려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방(잠) 안팎을 싸돌아다니는 무모할 정도로 무력한 '너'의 존재가 '잠'이라는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으니 그것으로 나의 작가가 된 것이라 믿었고, 가끔 페렉의 소설을 펼쳐보게 되었다.

▲ <잠자는 남자>(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리고 '울리포'가 있었다. 페렉이 수학자와 과학자 그리고 작가 이탈로 칼비노와 레몽 크노 등과 함께 만든 '잠재 문학 작업실' 이라는 창작집단 '울리포'(Oulipo)는 그 이름만큼이나 문학적 스크래치를 주기에 충분했다. 수학, 생물학의 논리와 체계를 문학에 도입하고, 구체시, 글자 빼기, 회문의 글쓰기 등 다양한 문학적 실험을 하고 현재에도 그 모임이 이뤄지고 있지만, '울리포'(☞바로가기)는 '만리포' 만큼이나 멀리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언어의 해변 같은 것이다.

누구나 걸어 다닐 수 있지만, 깊이와 너비도 알 수 없는. 페렉의 소설 <실종>이 알파벳 'e'자를 뺀 단어들로 쓰였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반대로 알파벳 'e'만 사용된 단어들로 쓰였다고 해도, 그것은 해변의 깨진 유리병에 불과할 것이다. 반갑게도 최근에 국내에 '울리포'에 대한 책이 발간(☞바로가기) 됐으니 그 무한한 문학 작업에 대한 정보와 가능성을 보다 쉽게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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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페렉의 <잠자는 남자>(조재룡 옮김, 문학동네 펴냄)는 제목과 달리 잠에 빠진 사람의 꿈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증자의 몽롱한 독백도 아니고 인간과 수면에 대한 심리적 허구적 풀이는 더더욱 아니다. 누군가 무슨 소설인가요? 물어온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친절해진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인물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애쓰다 말다 하다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되는 이야기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소설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인가. 소설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13쪽)

소설의 첫 문장이다. 어떤 소설은 다 읽고나면, 혹은 읽어가는 중에 첫 문장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읽어가면서 계속 앞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이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고,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아니다. 소설의 문장들은 첫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전진, 또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의 전진이 아닌 언어의 전진이다. 쉼표, 마침표의 전진이다.

혼자 살고 있는 20대 사회학과 학생인 '너'는 어느 날부터 모든 인간적, 사회적 관계를 끊고, '먹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거의 꼼짝하지 않고, 네 방에 머물거나'(22쪽), '오로지 기다림과 망각만을 원할'(23쪽)뿐이다.

누군가 "난 내일부터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거나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을 끊고 자취를 감춰버리면, 우리는 "왜"라고 묻게 되거나 그를 찾아 나서게 된다. 소설 속 '너'에게도 친구들이 찾아오지만 방안에 있는 '너'를 만날 수 없다. 심지어 고향집에 가서도 부모는 인물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느냐. 우리가 대신 물어 볼 수도 있는데, 그 물음은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물음은 '너'를 이해하거나, '너'를 이해시키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 물어봐도 너는 "그냥, 그래"라고 할 것이다.

많은 소설들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것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벌어진 일을 더 크게 벌려 놓는 것에 반해, 이 소설은 어떤 상태를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다. '너'라는 상태를. 그러나 그것을 반복을 통한 억눌린 상태의 분출이 아니다. 그저 다른 언어로 너의 상태를 나열하기다. 너는 그저 머물거나 움직이고 있는데, 존재와 부재라는 말의 무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너'는 '겨우 존재하는 인간'도 아니고 '특성 없는 남자'도 아니다. 이 지점이 흥미롭다.

소설을 읽다보면 욕망과 요구와 심지어 욕구까지 결여된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끈질기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있는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너'는 소설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하고 있다. 너의 다락방. 너의 거리, 너의 카페. 너의 극장, 너의 잠을 스치면서 너는 계속 가고 있다. 어디로? 여기로. 여기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너'. 아무 것도 찾지 않고, 어떤 것도 향해 가지 않으면서 돌아오는 '너'. 누구도, 그 무엇도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여기로 계속 돌아오는 '너'를 따라가기 위해 소설을 계속 읽는 것이다. 언어 속에서 '너'는 잠들지 않는다.

"그 무엇도 원하지 않기. 기다릴 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기. 늑장 부리기, 잠자기. 인파에, 거리에 휩쓸리게끔 너 자신을 방치하기. 도랑을, 철책을, 배를 따라 물가를 좇기. 강둑을 따라 걷기, 벽에 찰싹 붙어 지나가기. 네 시간을 허비하기. 온갖 계획으로부터, 모든 성급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욕망 없이, 원한 없이, 저항 없이 존재하기."(45쪽)

▲ <사물들>(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펭귄클래식코리아
'귀여운 몰취미'라고 볼 수 있는 이런 대목들이 소설 전편에 깔려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나불대야만 하는 것. 그 누구를,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닌 '너'에 관한 문장들이 이 소설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가가 중요했던 페렉에게 이 소설은 '왜 소설 속 인물들은 무언가를 해서 무엇을 얻거나 잃어야 하는가'에 대한 모험일 것이다. 문학의 형식에 대한 과격한 반론과 정의가 아닌 '왜 이러면 안 되나.'에 대한 소설적 모험이다. 무수한 쉼표로 이루어진 장문들, 가느다란 문맥을 끊고 딴청을 부리는 문장들, '너'가 잠시나마 시선을 두는 사물의 목록들을 보면 소설적 모험은 다시 언어의 조합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무력한 시선이, 걸음이, 중얼거림이 소설을 끌고 가지만 내면의 통증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옆으로 전염되어 나가는 글이다. 문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오로지. 무관심의 시선으로. 부정의 방식으로. 나열하기! 배열하기! 로서의 문학적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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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에서도 저는 기본적으로 두 작가를 이용해……'법률서기 바틀비'라는 멜빌의 단편과 카프카의 '죄, 고통, 희망, 진리의 길에 관한 명상', 그러니까, 카프카의 <일기>입니다."(161쪽)

해설에 인용된 페렉의 말이다. 소설의 서문에는 카프카의 글이, 뒷부분에는 멜빌의 소설이 언급되고 있다. 소설 곳곳에는 번역자의 꼼꼼한 주석으로 1960년대 파리의 거리, 물건, 문화들을 엿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잠자는 남자>의 문장들이 다른 소설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애정과 조롱 속에서 인용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모든 소설은 이전 소설에 대한 인용이자 패러디일 수밖에 없음을.

"네 고귀함을, 네 고뇌를 흥분으로 몰고 가는 모범적인 이야기들이 그 얼마나 많이 있는가! 얼마나 많은 로빈슨이, 로캉탱이, 뫼르소가, 레버퀸이 존재하는가! 훌륭한 요점들, 아름다운 이미지들, 새빨간 거짓말들. 그러니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증명할 줄 알 리가 없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믿지 말거라, 순교자들을, 영웅들을, 모험가들을!"(124~125쪽)

▲ <인생 사용법>(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구토>(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의 '로캉탱'이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대표인간으로 남은 것과 달리 <잠자는 남자>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너'는 어떤 인간도 표상할 수 없을 것이다. 허구를 통해 세계를 읽어내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을 말하기 위해 문장을 쓰지만, 결국 문장을 위해 인간이 움직여야 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문장들이 인간됨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보기 위해 페렉은 애를 쓴 것일까. 그것이 소설이 소설 속에서 소설들과 뒤엉키고, 밝혀지고,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기 바라는 페렉의 능력과 재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름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구토' 혹은 '멜랑콜리'가 살아 있음으로의 인간을 증명하는 것과 달리, '내일'도, '꿈'도 바라지 않는 '잠'은 오로지 '자는'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내일 부빌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라는 <구토>의 마지막 문장이 아닌 "너는, 클리시, 광장에서, 내리는 비가 멎기를, 기다린다"(122쪽)라는 문장으로 끝을 내야 하는 것이 페렉에게는 보다 중요했을 지도 모른다. '너'는 기다리지 않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염증과 환멸의 마지막 문장에서 비를 맞는다. "그리고 언제나 비, 비, 비, 비."(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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